자유주의자, 개저씨가 되다


결혼해 주세요, 노예가 될게요.

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 어떤 동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아’를 가진 동물인 인간이 어떻게 개미나 멸치떼처럼 사회적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를 바라는 지배계층의 인간들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되었다. ‘사회’가 존재해야 왕도 있을 수 있고, 지주도 있을 수 있고, 사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개인성향이 펄펄 살아 있는 개체들을 사회적 존재로 세뇌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일개미나 꿀벌처럼 사회의 존립을 위해 노동력을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제어할 수 있을까. 개인적 욕망의 가장 강력한 기본 단위는 사랑이다. 개인의 욕망이 멈추지 않는 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구나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사랑’을 ‘허락하는 조건’으로서의 결혼,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하는 의무를 조건으로 한다. 가정이란 사회의 기본단위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군사부일체!

그러나 개개인의 노동력과 가치관을 통제하기 위해서 고안한 일부일처제 결혼제도는 현실적으로는 영원한 사랑과 절대적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결혼이란 단지 가정이란 기초단위 사회의 탄생을 위한 두 개인의 소멸이다. 그럼으로 해서 자아를 삭제해야 하는 고통과 함께 억압과 착취와 자아기만적 삶을 영위하도록 유도하는 완벽한 프로그램이다. 결혼이란 사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은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애정행각에 대해서 얼마나 너그러울 수 있는가. 사람들이 사랑을 하게 되면 그 기쁨과 행복을 정당하게 누리기 위해서 결혼식을 해야 한다. 결혼식이란 다름 아닌 “신랑(신부) 아무개는 신부(신랑) 아무개를 ‘평생토록’ 사랑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라고 맹세하고 구청에 가서 새로 주민등록을 하는 일이다. 그리고는 개인의 자기 만족을 위한 꿈과 취향과 욕망과 시공간적 자유와 변수로 가득한 미래는 모두 종결되고 대신 가정(사회)을 튼실하게 경영하기 위한 헌신과 노력만이 미덕으로 남겨진다. 행복은 가정화목순이다. 가화만사성!

동전의 양면이 행복과 불행이듯이 결혼도 그러하다. 결혼을 못해서 고통스러운 사람, 결혼을 했다가 이혼당한 사람, 결혼을 했지만 사랑이 식어서 고통스러운 사람, 증오심만 남은 부부지만 자식 때문에 참고 사는 사람, 결혼했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사람,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하지 않지만 결혼해야 하는 사람…. 하지만 사람들은 결혼과 관련한 이 수많은 불행들을 보면서도 결혼제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시도하기보다는 ‘남부럽지 않은 성공적 결혼’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더더욱 노력할 뿐이다. 작전성공!

한편, 현대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한 경제구조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제는 굳이 남녀관계를 통제하지 않아도 사회구조가 위협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케케묵은 결혼제도는 효용성을 잃어가고 있다. 개인의 행복을 보호하는 새로운 규칙들이 필요하다. 정말 백년해로하고 싶은 이 백년해로하고, 사랑이 존재하는 동안만 함께 살고픈 이 그렇게 하고, 가정은 싫지만 2세는 원하는 이, 동성끼리 사랑하는 이, 다수를 사랑하는 이, 저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며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간이 진정 사회적 동물이라면 거기에 맞는 제도들을 만들 것이다. 진정한 ‘사회’란 모두가 획일적인 가치관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다양성이 평등하게 인정되는 것이리라. 근본적으로 그 어떤 절대권력자도 사랑과 행복을 통제할 권력은 가질 수 없다. 그 어떤 사회집단도 획일적인 사랑의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두고보자. 고단수의 결속력을 가진 선진 사회집단부터 현재의 이 억지춘향식 결혼제도를 부숴나갈 것이다.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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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무렵, 국내 가장 대중적이었던 영화잡지에서 읽고는 무릎 탁 치며 "그래 이거야!"라고 소리쳤던 글이다. 당시 내 생각으로는 문장 하나하나 어느곳에서도 흠 잡을데 없는 논리라 생각했다. 나보다 생각의 폭과 깊이가 훨씬 넓었던 친구는 당시 상당히 몰입해서 글을 읽고 나서는 출처가 영화 잡지 인것을 보고는 "낚였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출처따윈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이 글은 나의 결혼관과 나아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국가를 바라보는 시각을 만드는데 꽤나 기여한 것 같다.

우연일까 아님 필연적일까. 하나의 기사를 통하여 위의 글을 10년 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바로 글쓴이이인 김형태 씨가 성희롱, 사직강요 등으로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사장에서 해임되었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허핑턴포스트: 한때 예술인이었던 김형태 박물관문화재단 사장의 최후, http://www.huffingtonpost.kr/2016/11/14/story_n_12951878.html?utm_hp_ref=kr-entertainment)

기사의 본질과는 상관없겠지만, 기사를 접하고 몇가지 부분에서 놀랐다. 하나는 이런 꽤나 아나키즘적인 혹은 자유주의자인 글쓴이가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사장이라는 국가의 녹을 먹는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도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처음 공유한 글을 쓴 이후 10년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변절을 한 것일까? 혹은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그저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굉장히 이기적이거나 자기 기만적인 인물이었는지도. 가끔 비슷한 일을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에게서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혹은 고압적인 방법으로 대중을 대하는 태도를 발견할때다. 아연질색한 내가 그렇다면 진보와 보수가 무엇이 다르냐고 물으면 추구하는 내용이 다르다고 답한다. 하지만 내용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힘들다. 가치관의 차이일 뿐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대중은 이를 두고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냈다)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일까. 아니면 '내로남불'일까. 어찌하였든 상기 사례의 답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쨋든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10년 만에 글을 다시 읽는다. 지금으로서는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자아를 가진 존재와 사회적 존재는 양립할수 없다는 존재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리고 각종 제도를 만들어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은 과연 지배계층의 의도일 뿐일까, 아니면 대중이 더 크고 장기적인 이익을 위하여 선택한 것인가.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 중인 요즘(아직 반도 읽지 못했음을 고백함) 다시금 떠오르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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