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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일상

<운명이다> 중

by 막둥씨 2015. 1. 26.

2012 여름 봉하마을

특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문송면 군의 죽음과 ‘원진레이온 사건’이다. 1988년 여름 서울 양평동 온도계 제조공장에서 일하던 문송면 군이 일을 시작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수은중독에 걸렸다. 중독 판정을 받고 석 달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같은 시기에 원진레이온 사건이 일어났다. 원진레이온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던 회사로, 일본에서 중고 기계를 들여와 비스코스 인견사를 생산했다. 그런데 제조 공정에서 나오는 이황화수소가 문제였다. 환기 시설이 없는 작업장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이 신체가 마비되는 병에 걸렸다. 피해자 가족들이 협의회를 만들어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단체들이 그들을 도왔다. 88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시기였지만, 우리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산업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통일민주당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아한 언행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았던 평민당 박영숙 부총재와 함께 현장 조사를 나갔다. 우리는 회사를 추궁해 직업병임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합의서를 받아 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다시 회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휠체어에 앉은 사지마비 환자를 만났다. 어린 딸이 곁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안면 근육이 전부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려 했다. 열서넛 먹어 보이는 딸이 내 차 유리창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 아버지의 일그러지고 굳어 버린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988년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하면서 참담한 노동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있는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국회의원회관 사무실로 수없이 많은 격려 전화가 왔다. 그러나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중,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102-103쪽.

* 옛 문서를 정리하다 4년여 전 갈무리해둔 글귀를 포스팅해본다. 당시엔 졸업 후 무슨 일을 가장 처음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었는데, 어쩌면 이 책을 통해 접한 이야기의 영향이 매우 컸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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