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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기고

적정기술, 기술에 체온을 입히다

by 막둥씨 2015. 6. 1.

휴대전화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지난달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발표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는 6세 이상 인구 가운데 92.4퍼센트가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기준 휴대전화 단말기의 교체주기는 평균 1년 7개월이다. 고장은커녕 낡기도 전에 바꾸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의미다. 그나마 2012년 1년 6개월, 2013년 1년 5개월로 해마다 이용 기간이 짧아지다가 최근 다소 늘어난 수치다.


사람들은 왜 이리도 자주 고가의 전자제품을 교체하는 걸까? 휴대전화 제조사와 이동통신사의 짝짜꿍으로 탄생한 상술 탓이 크겠지만, 사용자의 입장만 본다면 새로운 기술이 탑재된, 더 좋은, 더 빠른 제품에 대한 욕구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소비가 휴대전화 산업을 더욱 키우고 관련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얼핏 선순환처럼 들리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다. 인류에게 주어진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폐기물은 증가하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소비는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방향일까?


첨단 기술에 든 의문


휴대전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우리는 불과 몇 년 전에 사용하던 PC 성능과 맞먹을 정도의 고성능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활용도는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전화나 SNS, 웹서핑, 사진 정도가 주를 이룰 것이다. 심지어 전자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2년 마다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교체는 하지만 사용하는 건 언급한 정도가 전부일 수도 있다. 새 스마트폰이 최신 기술을 반영할지언정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인지는 의문인 것이다. 단순하고 고장이 잘 나지 않으며 꼭 필요한 기능만 탑재해 저렴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순 없는 걸까? 그런데 이 문제는 국가 간 불균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에게는 필요할지도 모를 휴대전화나 스마트폰이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다거나 전기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개발도상국 국민에게도 여전히 좋은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5년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사회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보다는 어떤 지역에 적합한 중간 정도의 기술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특이하게도 슈마허에게 중간기술에 대한 영감을 준 것은 비폭력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도의 간디였다. 인도의 성인이라 불리는 간디는 생전에 물레를 돌려 실을 잣자고 역설했는데, 당시는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방직산업이 발전해 옷이 대량으로 생산되던 시기였다. 얼핏 생각하기에 사람의 시간과 노동이 필요한 일을 생산성이 월등한 기계가 대신하니 좋을 것만 같지만, 간디는 이런 방식이 경영자에게는 부를 주겠지만,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뺏긴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첨단 기술이 불러오는 지역 사회의 파괴였다.


슈마허의 중간기술 개념은 이후 단순한 중간의 개념이 아닌 어떤 사회에 적합하다는 의미를 지닌 ‘적정기술’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안된 적정기술은 오늘날 국가 간 원조인 국제개발의 영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다.

 

 

로프펌프의 원리


다시 태어난 2000년 전 우물


전문가들은 적정기술의 요건으로 적은 비용, 최대한 현지의 기술과 재료를 사용, 간단한 사용법,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 활용 등을 꼽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현지 문화와 여건에 대한 이해도 포함된다.


다음은 캄보디아 깜뽕참주 바티에이군 뚬놉면의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지역에서는 깨끗한 물이 귀하다. 강물이나 연못에 고인 빗물이 주민들의 유일한 생명수였다. 주민들은 연못에서 퍼온 부옇게 탁한 물을 집 마당의 큰 항아리에 모아 놓고 사용했다. 그런데 연못물은 사람들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가축이나 동물들도 사용했다. 때때로 비소 농도가 높아 사람에게 치명적인 웅덩이도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지 않은 물로 매년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거나 목숨을 잃었다. 우물을 파서 깨끗한 지하수를 이용하면 될 터인데 왜 주민들은 이렇게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었을까? 외국에서 온 국제개발 담당자들은 주민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곳에도 깨끗한 지하수를 펌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우물이 선진국의 원조를 통해 만들어졌다. 지역 초등학교에도 우물이 3개나 들어섰다. 하지만 한 유럽국가가 설치해준 값비싼 펌프는 1년도 안 돼 고장 났다. 그보다 이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준 펌프도 있었으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녹이 슬어 고철이 됐다. 현지 주민들은 수리법도 모르고 부품 값도 비싸다 보니 한 번 고장 나면 고칠 수가 없었다. 주민들과 아이들은 다시 더러운 웅덩이 물을 마셔야 할 위기에 처했다.


이후 마을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은 전임자들의 실패를 반성했다. 그리고 기존의 고급스러운 펌프 대신 주민들이 직접 수리할 수 있고 수리비용도 매우 저렴한 새로운 우물을 제안했다. 그렇게 설치된 우물이 바로 로프 펌프(Rope Pump) 방식의 우물이다. 2000년쯤 전 중국에서 처음 사용됐다는 로프 펌프 방식의 우물은 펌프가 고장 나도 7달러면 부품을 교체할 수 있었다. 주민이 직접 수리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새 펌프 가격도 100달러 정도로 기존 펌프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렇게 현지의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왜 현지 주민들이 우물을 만들지 않았는지 깨닫게 됐다. 물론 절대적인 가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캄보디아의 사람들은 협동심이 부족했다. 1970년대 후반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 일어난 끔찍한 학살 속에서 부모나 형제, 친구를 잃으며 이웃에 대한 불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이해하게 되자 일각에서는 우물을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고 공유재로서 함께 관리하도록 마을 회의 같은 장치들을 마련했다. 공동체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적정기술이 지역의 문화나 역사와도 맞닿는 부분이다.

 

 

하마물통 ⓒProject H Design


다양한 적정기술 사례


적정기술이 적용된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Q드럼과 하마물통(Hippo water roller)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이동해야만 하는 아프리카 여성들을 위해 고안됐다. 아프리카에서는 5명당 2명이 깨끗한 물을 이용하지 못하며, 물을 길어오기 위해 여성들은 무려 20킬로그램의 물통을 머리에 이고 수 킬로미터씩 오가야 했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깨끗한 물이 쏟아지는 우리에 비해 이들에게 물에 대한 접근은 하나의 중노동이었다. 매일 장시간 무거운 물통을 머리에 이다 보니 고질적인 척추 부상, 목 부상이 발생했다.


이런 수고와 위험을 덜기 위해 만들어진 Q드럼과 하마물통의 원리는 간단하다. 도넛 모양의 용기를 만들어 물을 채운 후 줄을 이용해 바퀴처럼 끌고 가거나, 원통 모양의 용기 양 끝에 손잡이를 달아 굴릴 수 있게 만들어 물을 긷기 편하게 고안했다. 매우 단순한 원리로 제작은 간단하고 가격은 저렴하며 효과는 크다.


적정기술이 개발도상국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적정기술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특히 난방과 관련한 분야에서는 아마추어들의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일례로 매해 겨울 완주군에서 열리는 고효율 자작화목난로 연경대회 ‘나는 난로다’ 행사는 일반 시민들 참여가 두드러진다. 독특한 모양, 다양한 방식의 화목 난로가 출품되어 효율을 겨룬다.


일반 시민들이 제작하는 태양열 온풍기도 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난방비가 걱정인 사람들, 친환경 건조기가 필요한 사람들, 에너지 자립이 목표이거나 취미인 사람들이 직접 개발에 나섰다. 이들이 만든 온풍기를 보면, 직접 제작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멋스러운 외관을 보유한 제품부터, 겉보기는 다소 조잡한 제품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들면 외관에 상관없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공기가 생산되어 집이나 건조실을 덥혀 준다. 지구에 해가 뜨는 한 반영구적으로 작동하며 고장 나도 손쉽게 고칠 수 있으니 겨울 낮 보조난방기구로는 훌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기름보일러나 전기보일러가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다. 혹자는 난방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또 어떤 이는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를 폐쇄하고 싶어서 등 이유는 다양하다. 그럼에도 공통점은 있으니, 단지 편리한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상황에 가장 적합한 기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기술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태양열 온풍기 ⓒ부안시민발전소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이제 기술 선진국에서도 적정기술에 대한 고민이 이어져야 한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적정기술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비전력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일본의 후지무라 야스유키 교수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개인적으로 과거의 50년을 두 시기로 나누면, 전반 25년은 전자제품을 도입하면서 행복감이 높아진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 25년에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손발을 이용해서 기술을 갈고 닦는 행복, 따뜻한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를 잃어버린 것 같다.”


기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하고 있다. 앞서 휴대전화를 2년마다 교체하는 현상에 대한 고민처럼, 기술의 사용과 소비에 앞서 인간이나 환경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적정기술이 완벽한 답은 아니다. 하지만 방향은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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