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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채우는 여행

만해 한용운 심우장

by 막둥씨 2010. 5. 26.
심우장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 혜화동 방향에서 삼청각쪽으로 가다 보면 보이는 국화정원이라는 큰 간판 맞은편이다. 50미터라고 적혀 있지만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멀다.
골목은 꽤나 가파르고 좁으며 달동네 같은 분위기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사진처럼 작게 심우장 방향이라 써 있는 글귀가 있다.
심우장 대문. 심우장이라고 한자로 써 있는 것 외에 특별한 표지가 없어 자칫 지나치기 쉽다. 일반 가정집 대문과 똑같이 생겼다. 대문 너머를 슬적 봐도 양옥집이 휑하니 보여 더욱 일반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리용으로 지어졌다는 양옥건물만 바로 앞에 붙어 시야도 가리며 우악스럽게 서 있다. 평일 오전은 방문객이 거의 없어 참새소리만이 온 집안과 마당에 울려퍼질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90년 되었다는 소나무만이 묵묵히 서 있다. 서늘한 북향의 툇마루에 앉아 이 찾는이 없는 풍경속에 묻혀 있자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심우장 전경. 문이 북으로 나 있어 볕이 들지 않는다. 집은 정말 작고 간소하다.


그나마 볕이 드는 건물 뒤편의 남쪽에 풀이 자라고 있다.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파고들 집임이 분명하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심우장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이다.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만해(萬海, 卍海)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곳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 일명 十牛圖ㆍ牧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다. '목부'는 '심우'와 같은 뜻으로, '심우장'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을 가졌고, '심우장'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서울시 홈페이지 소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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