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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기고

고작 쌀밥 한 그릇이라고요?

by 막둥씨 2015. 4. 13.

1980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규모 여름 냉해로 쌀 생산량이 전년의 3분의 2수준으로 급감하는 일이 발생했다. 식량 수급에 비상이 걸린 정부는 쌀을 구하기 위해 국제 곡물 회사에 매달렸다. 당장 밥줄이 끊길 지경이니 부르는 게 값이었고, 결국 국제 시세의 2.5배나 지불하고 쌀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다른 국가나 기업들에 잉여가 없거나 혹은 의도적인 이유로 쌀을 팔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다.

 

ⓒJunho Jung / wikipedia

 


불안한 우리의 식량 안보


식량이 무기화된다는 건 이제 옛말이 아니다. 위 경우처럼 특정한 이유로 단지 한 해의 먹을거리만 부족하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으리라. 하지만 더는 식량 생산에 투자하지 않아 먹을거리를 생산할 땅도, 씨앗도, 사람도, 기술도 없다면 어떡해야 할까? 세계적인 자유무역협정의 흐름 속에서 자급률을 지키는 게 곧 한 나라의 안보를 지키는 일이 된 이유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 수준이다. 사료용을 포함한 곡류의 자급률은 고작 30.2퍼센트로, 스위스 205.6퍼센트, 미국 129.4퍼센트, 영국 100퍼센트 등과 견주어 보면 형편없다. 사료용을 제외한 식용 양곡 자급률도 고작 40퍼센트대에 머물고 있는데, 그나마 쌀이 1퍼센트대인 밀이나 4퍼센트대인 옥수수 등 다른 식량보다 자급률이 높아 견인차 역할을 한 덕분이다. 그런데 이 쌀도 최근 몇 년 사이 자급률이 떨어지고 있다. 지난 2000년대 100퍼센트를 오르내리던 쌀 자급률은 2010년 104.5퍼센트를 기점으로 2011년에는 83.1퍼센트로 떨어졌다. 태풍 등 이상기후 탓이 컸는데, 당시 쌀 수급 대란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자급률이 높았던 2009년에 비축해둔 쌀 덕분이었다.


2013년 쌀 자급률은 89.2퍼센트로 어느 정도 회복세에 오르긴 했지만, 쌀 산업의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올해부터 국내 쌀 시장이 개방됐기 때문이다. 지난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로 우리나라는 관세를 부과하는 조건으로 모든 농산물을 개방하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쌀만은 개도국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아 20년간 개방을 유예하며 국내 쌀 시장을 지켜 왔다. 대신 의무 수입량이 설정됐는데, 1995년 5만 톤을 시작으로 꾸준히 늘어 작년에는 40만 톤까지 올랐다. 올해 다시 쌀 시장 개방을 유예하려면 의무 수입량이 82만 톤으로 늘어나기에 오히려 개방하는 것이 낫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정부는 높은 관세를 매겨 국내 쌀 산업을 지키겠다고 공언하며 513퍼센트의 관세를 세계무역기구에 제출했다. 그러나 아직 세계무역기구의 검증이 남았으며, 이미 미국이나 중국 등 다섯 나라가 우리나라의 쌀 관세율에 이의를 제기한 상태여서 관세율 통과에 진통이 예상된다. 게다가 차후에도 강대국들이 관세율 인하를 꾸준히 요구할 가능성이 커 관세율이 낮아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정부가 예외 없는 관세철폐를 지향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서두르고 있는 마당인 점 등을 고려하면 높은 관세는 말뿐인 허울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쌀이 세상에서 제일 싸다”


쌀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필요한 열량의 20퍼센트를 공급하는 귀중한 곡물이다.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필요 열량의 70퍼센트 이상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사람들은 필요 열량의 60퍼센트 이상을 쌀에서 얻는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필요 열량의 30퍼센트가량을 쌀에서 얻고 있다. 하지만 농부들은 흔히 “세상에서 가장 싼 게 쌀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역의 어느 농업대학에서는 한 해 동안 일정 면적의 논에 쌀농사를 지어 수지타산을 매겨봤더니 이익은커녕 적자가 났다고 한다. 인류에 공급되는 열량 비중을 생각하면 쌀은 상당히 저평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도 쌀 자급률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쌀직불금이 대표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겠다. ‘쌀 소득보전 직접지불금’의 줄임말인 쌀직불금은 고정직불금과 변동직불금으로 나누어 농지 면적당 일정 금액을 보조해주거나 쌀 가격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 정부가 정한 기준가격과 실제 시장에서 형성된 쌀 가격의 차이를 정부가 보전해주는 제도다. 하지만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행정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지급되는 돈이 농업에 투자된다고 보장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국내에서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난다면, 지난 1980년보다 더욱 심각한 식량 안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당장 외국산 쌀이 매우 싼 이유도 우리의 쌀 자급률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자급률이 낮다는 건 그만큼 의존도가 크다는 말이다. 만약 국내에서 더는 쌀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현재 저렴하게 설정된 수입 쌀 가격도 당연히 급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의 생명 줄을 일부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이 쥐락펴락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식량 공급원으로서 쌀의 역할은 우리가 얻는 이익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004년 농림부와 농협은 ‘당신의 생각 곱하기 12.5’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우리 농업에 대한 인식을 전반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캠페인 이름인 ‘당신의 생각 곱하기 12.5’는 우리 농업이 사회에서 담당한 역할을 보통 식량생산만으로 국한하기 쉬우나, 생물종 다양성의 근간으로서 논 습지의 기능, 도시인들의 정서적인 안식처, 관광자원 등 각종 이득을 생각해 보면 우리 농업의 역할은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12.5배나 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논 습지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01년 108만3000헥타르였던 벼 재배면적은 2008년 93만6000헥타르를 거쳐 지난 2013년엔 83만3000헥타르로 과거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 1인당 쌀 소비량이 줄어든 영향이 큰데, 1998년에는 국민 한 명당 연간 99.2킬로그램의 쌀을 소비했지만, 지난 2013년에는 67.2킬로그램만 소비해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다른 잡곡이나 과일 등 대체식품 소비량이 증가하고, 다이어트 등으로 결식횟수가 증가했다는 게 정부의 분석이다. 소비자들이 쌀을 더 소비하면 좋겠지만, 생활양식이 바뀌는 것 또한 자연스런 변화이므로 이제부터는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내 밥공기는 내가 지킨다!

 

생협은 그간 안전한 먹거리 확보와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계약재배와 책임소비로 국내 농업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주곡으로서의 쌀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내부 정책에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두레생협은 쌀을 일반 마트에서 판매하는 동급 제품보다 10퍼센트 가량 싼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생산자와 조합원 모두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돌아가게끔 이윤을 거의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두레생협이 올해 도입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수매 선수금 제도는 책임소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형태로 소비자가 생산물의 값을 미리 지급해 생산 과정에서부터 참여한다는 개념이다. 이 제도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인데, 농사철이 시작되는 봄부터 큰 비용이 필요해 빚을 내야 하는 생산자들은 이 제도를 통해 이자로 내야 할 비용을 아껴 소비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제도의 시작은 단연 쌀부터다. “쌀은 채소 등의 작물에 비하면 생산하는 기간이 매우 길다. 생산자들이 1년 농사를 지어 투자비를 회수하는 건 도정 후 판매할 때나 돼야 한다. 일정 부분을 미리 지급하면 더욱 안정적이고 생산물에 대한 책임감도 높아질 것이다.” 에코생협의 최재숙 상무는 생산자가 비용 걱정 없이 책임지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분명 더 좋은 제품으로 보답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수매 선수금 제도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뢰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면 물품 사고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물론 선수금을 기꺼이 낸 조합원을 위한 생협 자체적인 혜택도 마련할 예정이다.


아이쿱생협은 이미 수매 선수금 제도를 통해 쌀, 콩 등 양곡을 수매하고 있다. 이용하는 조합원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제도 도입 초기인 2012년 전체 조합원 가운데 11.3퍼센트 정도가 이용했지만 2014년에는 24.5퍼센트까지 올라 총 4만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수매 선수금 제도를 통해 곡식을 구입하고 있다.


아직 참여하고 있지 않은 가정이라면 올해부터는 수매 선수금 제도를 통해 쌀 소비 계획을 세워보자. 식량 안보에 위협 받는 우리 가족의 밥공기를 지키는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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