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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전국일주 캠핑

[전국일주 13일차] ③ 백련사, 다산을 찾아서2

by 막둥씨 2013. 10. 13.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때론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종종 느끼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유홍준 선생의 책에도 소개된 동자 석상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산중턱에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석상은 나오지 않았다. 모 선생은 또 얼마나 달려드는지 절로 욕이 나왔다. 빌어먹을 모기놈들!! 천천히 걸어서는 모기밥이 될 것이었기에 우리는 거의 뛰는 것에 가까운 속보로 800미터의 산길을 내달렸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땀이 뻘뻘 흘렀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여행의 즐거운 마음도 사라질 지경이었다. 이차저차 결국 만덕산을 다 넘고 백련사 경내가 눈에 들어왔지만 끝내 석상은 나오지 않았다. ‘뭐지? 석상이 없어졌나...’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에서 내려와 백련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차밭이 있었다. 헌데 말이 차밭이지 잡초가 웃자라 거의 풀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무리 차를 따는 시기는 봄이라지만, 이렇게 관리가 안 된 것이 의아했다. 무심코 지나치면 차밭인지도 모를 것 같았다. 그렇게 만덕산을 넘어 차밭을 지나 우리는 백련사를 맞이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의 짧은 거리 만큼이나 다산은 백련사와 연이 깊었다. 유배를 온지 5년이 되는 1805년 봄, 다산은 거동이 조금 자유로워져 백련사를 방문하게 된다. 그때 백련사의 주지가 서른넷 나이의 혜장선사였다. 혜장은 다산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허나 그들의 사귐에 큰 방해물은 되지 않은 것 같다. 술을 즐기는 파격적인 승려였던 혜장은 차에 대해서도 풍부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산과 유교, 불교 그리고 차를 공유하던 좋은 벗인 혜장은 40의 이른 나이에 죽는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던 터일까? 혜장은 죽기 전 다산에게 어린 초의선사를 소개했다. 다산과는 24살 차이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초의는 파격적인 승려였던 혜장과는 달리 온화하고 기품이 있었다. 게다가 초의는 훗날 조선후기의 다도문화를 중흥시킨 장본인으로 일컬어지니, 다산은 혜장과 초의를 거치며 차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초의의 발자국은 그가 기거하던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에서 다시금 찾게 될 터다.)

 

 

차밭을 지나 백련사 경내로 들어갔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백련사를 찾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종각 앞에 덩치큰 하얀 개 한 마리만이 엎어져 낮잠을 자고 있었다. 법당에서는 스님이 홀로 예불을 드리는 육성이 맑은 목탁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반대편에는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모 선생과의 사투를 벌이며 헐레벌떡 산을 넘어온 우리만이 이질적인, 그야말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만경루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이 소리들에 귀 기울였다. 시간이 멈춘것만 같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곳에서 쓰는 거구나 싶었다. 

 

잠시 후 예불을 마친 스님이 나와 인사를 나눴다. 40전후의 나이로 보이는 스님의 법명은 원정이었고, 종각 앞에서 낮잠을 자던 녀석은 정진이라는 이름의 풍산개였다. 정진은 원정스님이 애지중지 키우는 개였다. 녀석도 스님을 잘 따랐다.

 

“차 한 잔 하시렵니까?”

 

 

스님은 우리에게 고맙게도 차를 대접해 주었다. 절에 딸린 차밭에서 직접 키워 채취한 차라고 했다. 나는 아까 지나온 풀밭을 떠올렸다. 스님은 이 차는 농약을 치지 않고 키운 야생차종이라고 했다. 아까 지나온 차밭이 풀밭인 이유였다. 산지에서 먹어서인지 스님이 내려주어서인지 차는 향기롭고 그윽했다. 스님은 차를 따는 시기가 일 년중 가장 바쁘다고 덧붙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차 향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덧 공양시간이 되었다. 덕분에 가난한 여행자인 우리는 운 좋게 점심공양까지 함께했다. 모든 반찬이 입맛에 맞았으나 매실장아찌가 특히나 맛있었다. 점심식사를 준비하신 보살 아주머니는 우리가 유랑객인걸 알자 김치와 장아찌를 싸 주셨다. 정말이지 고마웠다. 밥만 먹고 갈 수는 없었다. 보살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시는 걸 억지로 우겨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거듭 인사를 드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풍산개 정진이는 또다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와도 눈 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마 개 팔자에 순응하고 있는 것일 테다.

 

백련사 마당자락에서 다시금 강진만을 바라본다. 다산은 그의 유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산은 이곳에서 귀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훗날 유배에서 풀려나 거처인 두물머리에서 머물 당시 다산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능히 다산에 돌아가지 못하니 죽은 것과 같구나.” 아이러니 하게도 유배지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모 선생과 싸우며 땀범벅이 되었지만, 나 또한 아직도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잊지 못한다. 만경루에서 보이던 강진만과 들려오던 목탁소리, 스님의 육성, 지저귀던 새소리, 정진이, 원정스님과 함께 마신 야생차의 향기와 점심공양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 동자석상은 기억과는 달리 다산초당에서 귤동마을로 내려오는 뿌리의 길 한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행이 내려오는 길에 놓치지 않고 우리는 익살스런 표정의 동자석을 눈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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