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쓰기 - 백현국 울컥, 시들한 세상살이 |
들어가며
죽음도 삶의 일부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을 살다간 혹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자들이 너나없이 주장한 바다. 하지만 우리네 실제 삶은 그들이 주장한 바와 크게 간격이 있어 보인다. 나는 진실로 죽음을 긍정할 수 있을까? 당신은 삶을 영유하며, 언젠가 당신의 생이 소멸된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는가? 세상을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죽음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단어인 것처럼. 그런 개념은 자신의 인생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모두가 지식으로는 알다시피, 우리는 죽는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멋지게 죽을 수 있을까? 생각건대, 멋있게 죽는 건 결국 멋있게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삶의 끝자락에서(혹은 끝자락을 예정하고) 한 자루의 펜과 종이를 집어 든다면, 그 여백을 채울 글자들은 결국 당신의 삶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죽음은 삶이 있어야 완성된다.
그렇다면, 가장 비극적인 죽음은 무얼까? 개인적으로 고하자면, 준비할 틈도 없이 맞이하는 죽음일 테다.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졸던 운전수의 덤프트럭에 치여 즉사하는 것 같은 죽음 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지막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건네받을 수도 없는, ‘아! 이럴줄 알았으면 그녀나 그에게 고백이라도 해볼걸!’ 하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는 죽음... 죽음이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는 현자들의 말은 수긍이 안 갈지언정,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죽음을 준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다.
그 첫 단추로 유서를 써 볼 참이다. 제2호 유서를 구상하며 몇몇 강냉이들에게 이런 제의를 했을 때, 그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유서라는 게 자살하는 사람만의 전유물이라 여기고 있던 사람도 있었고, 이미 유서를 써 본 이도 있었다. 사실 단어의 정의로만 치자면 전자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유서란 유언을 적은 글이고, 유언이란 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말이기 때문이다. 허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죽음에 언제 이를지 누가 어찌 알겠는가? 티벳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내세(來世)가 먼저 올지 내일이 먼저 올지 아무도 모른다.’
다시, 그래서 유서를 써보기로 한다. 아마 대부분에게 어색하겠지만, 어쩌면 이 과정에서 현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죽음이 삶을 더욱 값지게 할런지도.
유서1
20대 중반 여성
내가 죽었다니. 나도 지금은 믿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딱 한번 살고 딱 한번 죽어.
생각보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헤어지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온 삶이었어.
외로운 날도, 괴로운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
외로움도 괴로움도 살아있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겠지.
앞으로 네가 살아가는 동안, 너를 슬프게 하는 일들 힘들게 하는 일들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너와 함께하는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오는 동안 네가 있어 참 많이 웃었고 참 많이 행복했다.
고마워.
그리고 영원히 사랑한다.
혹시라도 내가 너를 아프게 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나를 용서해줄래?
제사 같은 건 지내지 않아도 좋아.
그저 나의 생일이나 기일에 가족들 친구들끼리 모여 함께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나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나누어 주면 좋겠다.
그것도 부담이 된다면, 그저 가끔 내가 떠오르는 순간에 네가 작게 미소지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참 좋겠다.
나의 유골은 대구 우리집 아파트 마당에 뿌려주었으면 좋겠어.
만약 경비아저씨가 싫어하시면 내가 졸업한 대학교에 뿌려주어도 좋아.
학교도 싫어한다면 가족들끼리 상의해서 적당히 정리해줘.
적지만 내 계좌에 있는 돈은 동생이 가졌으면 좋겠어.
부끄럽지만, 장례식에서 내 졸업 작품을 함께 보아준다면 행복할 것 같아.
많이 보고싶을 거야.
잘 살아. 넌 참 멋진 사람이야.
안녕.
유서2
20대 후반 남성
나 먼저 떠나며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먼저 묻고 싶다. 나는 어떻게 죽었나? 자연스럽게 죽었다면 문제가 없지만, 어떤 청부나 고의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면 응당의 조치를 취해주길 바란다. 개인적인 복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법적으로 말이다. 왜냐면 난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범죄의 재발도 우려되는 바다.
이제 몇 가지 부탁드리고 싶다.
첫째, 내가 죽으면 파티를 열라. 나와 가까운 이들은 다소 애처로울 수 있으나,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잘 알지 못하는, 건너 건너의 이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괜시리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더욱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장례식 대신 파티를 열라. 그리고 지인과 지인의 지인까지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 웃고 떠들 수 있는 파티를 통해 나에 대한 즐거운 기억을 서로 공유했으면 좋겠다.
둘째, 내 몸은 땅에 묻지 말고 가능한 부분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필요한 분들에게 기증하고, 혹여나 필요 없는 부위가 남는다면 화장을 하는 등 최소한의 공간과 오염만이 필요한 방법으로 처리를 부탁한다.
셋째,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은.... 없다. 내가 쓰던 물건들에는 어떤 저주도 씌우지 않고 오히려 행운과 축복을 담아줄 터이니, 태우거나 버리지 말고 자원으로서 잘 활용하길 바란다.
혹여나 이걸 읽고 계실 분과 내가 그런 사이가 아님에도 반말을 한 것으로 되어버린 경우가 있다면 정중히 사과드리며 먼저 간 이의 애교로 봐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엄마, 형, 누나! 늘 잘해줘서 너무 고맙고 사랑해요~ 데헷!!
- - - - - 이하는 주인공과의 일문일답
유서를 쓰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별로 없다. 유서를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 되는데 수년간 미루기만 하다가 이번 기회에 간략하게나마 써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 쓴 유서인가?
사실 특정 인물을 생각하고 쓴 게 아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가 죽은 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일반적인 상식 외에 바람들을 적어봤다. 특히 생각해보니 나는 갑자기 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이 죽는 것을 가정하고 쓴 것 같다.
자신의 죽음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
어렸을 때는 내가 죽어도 세상은 존재하고 더구나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이 정말 야속했다. 그러나 죽으면 이런 사고도 할 수 없으니 부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나의 세계는 내가 살아있을 때만 존재한다.
유서쓰기,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만한가?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어떤 특정한 목표만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에겐 인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볼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 브릿지에 설치된 자살 예방 메시지. Photo(cc) via (c) David Corby / wikipedia.org
유서3
서른의 남성
부모님께.
이 글을 보실 때면 아마도 저는 세상에 없다는 뜻이겠지요. 혹여 제가 세상에 있을 때 이 글을 보신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글은 혹시라도 제가 좋지 않은 일이 불현듯 찾아왔을 때를 대비하여 적는 것이니까요.
솔직히 저는 부모님보다 제가 먼저 세상을 등질까봐 항상 두려워요. 마음이 약하신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무척이나 힘들어하시는 모습과 항상 강인할 줄만 알았던 아버지께서 벗이 암으로 고생하다 일찍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고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죠. 저도 아직 젊은 30의 나이지만 군에서 삶의 멘토가 되었던 지인을 먼저 보내고 중학교 때부터 함께 어울렸던 친구의 죽음과 힘들어하는 그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나니 누군가를 보낸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배웠어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실 아직 그 사람들을 완전히 보내준 것 같지는 않지만요. 잊은듯하면 갑자기 저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생각나게 해줘요.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그들을 보낸 기억이 고통이 될지라도 그들과의 추억은 저를 그 고통보다 훨씬 기쁘게 해주니까요.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제가 떠난 고통보다는 우리 가족이 함께하였던 즐거운 기억으로만 가끔 웃었으면 해요. 계속 슬픔에 잠겨 계신다면 아마 저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테니 힘들어하지 마시고 편히 보내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주위에 연락하실 때는 용훈이, 동수, 현재, 병진이, 종혁이 형 이렇게 4명에게만 연락하면 그 사람들이 저의 마지막을 기억해줄 사람들을 불러줄 거예요. 용훈이가 중학교 친구들을, 동수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현재가 대학교친구들을, 병진이가 군대 친구들을, 종혁이 형이 산악오토바이 형들을 불러줄 테니 힘들게 너무 많은 사람에게 직접 전화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이렇게 적고 보니 생각보다 와줄 사람들이 많네요. 나이가 들고 나서는 결혼식에 찾아와줄 사람이 10명도 안될 까봐 걱정하였는데 생각보단 제가 잘 살고 있나보네요. 제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주위에 나눠줄 것도 없지만 오토바이만큼 제가 활동하는 동호회에 꼭 기부를 하고 싶어요. 항상 막내라고 챙겨주시고 도와주셨던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하나만큼은 드리고 싶네요. 오토바이는 103동 106동 사이에 있는 지하주차장 구석에 항상 세워두니 종혁이 형이나 다른 팀원 분들에게 제 컴퓨터 책상에 있는 열쇠 뭉치를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이외에 다른 물품은 알아서 정리해주시면 될 거예요.
형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 ○○에게도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 효자가 되고 싶었던 불효자 아들 올림 -
- - - - - 이하는 주인공과의 일문일답
유서를 쓰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대상 정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유서를 쓰려니 글이 이상하게 나오고, 대상을 정하려니 너무 짧아지는 뭐 그런 문제점이 있었다.
부모님을 대상으로 정하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가장 잘 되고, 나의 속사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니 글이 진솔하게 써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쓰려니 오글거리기도 하고.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식으로? 어떤 계기로?
젊은 지인들의 죽음으로 인해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생각해 본 적 없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죽음이란 무어라 생각하나?
더 이상 만들어질 기억이 없는 것이랄까. 죽고 나면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이야기 하지 못한다.
한 인간을 이루는 것은 기억의 집합이란 이야기인가?
오! 좋은 말이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은가?
두렵다. 첫째, 어마어마하게 아플 것 같아서. 둘째, 더 이상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으니까. 예를 들어 운동이라든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든가. 그리고 셋째, 남은 사람에게 슬픔을 줄 것 같아서.
유서 쓰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세문장 이상으로 말해 달라.
생각보다는 인간관계가 개차반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실상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아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현실은 작심삼일... 끝으로 먼저 보낸 이와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함에 대한 후회가 크다는 걸 느꼈다.
마지막 질문이다. 유서쓰기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가?
건강한 정신상태의 사람에게는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시금 나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리라 생각한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슬픔을 만들어내어 나쁜 결과로 이어질 것 같다.
유서4
20대 후반 여성
* 막둥씨의 재촉과 독촉과 갖은 협박에도 결국 유서는 쓰지 못함
- - - - - 이하는 주인공과의 일문일답
왜 쓰지 못했나?
막상 내 입장에서 대상을 바꿔가며 유서를 거듭 써보았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평소에 생각하던 죽음과 상충되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의 경험을 언급하게 되고 내 죽음 이후 그들의 기억 속에 있을 내 모습에 대해 집착하게 되며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죽음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더라.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못 쓸 것 같나?
세월이 지나 경험이 쌓이면 더 좋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이런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주변인들에게 이해시키고자하는 방향이 아닐까싶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기에 지금은 내 죽음에 대한 생각과 관념이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았다 느낀다.
죽음이란 무어라 생각하나?
평소에 죽음이 생명체로서 종족를 번식시키고 진화를 이끌어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여 죽음 또한 삶의 연장이어서 죽음 그 자체를 죽음이라고 분리시켜 의미를 둘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했다.
언제쯤 죽을 거라 생각하나?
죽음을 기다리며 살고 싶지 않기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때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지만 이에 대해 말하기엔 너무 이르다.
유서쓰기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겠나?
유서쓰기 또는 적어도 이에 대해 생각해보기는 추천하고자 한다. 삶과 죽음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했지만 분명 그 사이엔 넘어야 될 턱이 있고 이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나의 경우 유서를 통해 주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 아직은 없었기에 지금 그들 곁에 있는 시간에 그들에 대한 내 감정을 솔직하고 충분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Alexandre-Gabriel Decamps 작품 / wikipedia.org
에필로그
나는 유서를 부탁하며 유서 쓰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강냉이들에게 강조했더랬다.
“지금 죽으라는 말이 절대 아니야! 죽음을 고민해야 삶에 더 의미를 가질 수 있지. 그런 의미로 써달라는 말이라고!”
그러나 그런 나의 발언과는 반대로, 여기 자살 위험 징후의 몇 가지와 주변에서 이런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의 대처방법에 관한 스크랩을 하나 가져온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름 전문가가 썼을 터이니 한 번 믿어보려 한다. 그리고 이런 주의 깊은 태도로, 제2호에서 내게 유서를 던져준 강냉이들을 살펴볼 터다.(물론 농담이지만 그래도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자살징후
1) 45세 이상의 나이
2) 알코올에 의존하는 성향
3) 남자
4)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음
5) 최근에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보거나 중요한 사람과 이별한 일이 있음
6) 신체적 질병이 있음
7) 장기간 지속되는 우울증이 있음
8) 어려울 때 남의 도움을 받기를 원치 않음
9) 실직하거나 직장에서 은퇴함
10)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이혼함. or 독신
11) 정신과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음
위험징후
1)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죽고 싶다고 말을 한다.
2) 갑자기 성직자나 의사를 찾는다.
3) 태도가 위축되며, 식사량이 줄고 말도 없어진다.
4) 수면에 변화가 생긴다. 불면증이었던 사람은 갑자기 숙면을 취하게 되는 반면, 숙면을 취하던 사람에게는 불면증이 나타난다.
5) 알코올 or 약물 사용량이 증가한다.
6)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며, 무력감, 극도의 불안 or 공격 성향을 보인다.
7) 유언장을 작성한다.
8)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
9) 우울하던 사람이 만족과 행복 or 평화로움을 보이는 등의 갑작스러운 향상을 보인다.
대처방법
1) 주의 깊게 자살의 위험 신호를 살핀다.
2) 관심을 보이며, 도움이 되도록 한다.
3) 자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한다. 질문은 직접적인 형태로, 자살에 대하여 자유스럽고 공개적으로 묻는다.
4)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그 감정을 수용한다.
5) 억지로 무언가를 하도록 다그치지 않는다.
6) 대안이 가능할 것이란 희망을 주도록 한다.
7) 결정적인 묘수를 제공하려고 조언하지 않는다.
8) '왜'라고 묻지 않도록 한다. (이러한 질문은 심리 상태를 방어적으로 만든다.)
9) 쇼크 받은 듯이 행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거리감을 만든다.)
10) 감정을 동정하지 않고, 공감하도록 한다.
11)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한다. 자살 도구를 치우고, 정신과 의사나 자살 예방 전문기관에 도움을 청한다.
* 출처: http://www.koreahealthlog.com/2105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려 한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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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엮음 <강냉이> 제1호 :: 커피 (0) | 2015.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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