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접한 창덕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1926년 대조전에서 승하하는 날까지 기거하시던 곳인지라, 이제 까지 보아 온 그 어떤 궁과도 달랐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간 보았던 궁들은 텅 빈 곳간 같은 건물들만이 있었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도, 밥을 해먹는 공간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해 창덕궁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현대 문물이 들어온 흔적이 보여 때론 이질적이기 까지 했다.
몇 가지 들자면 이렇다. 우선 천정에 전등이 달려 있었으며, 고급 호텔의 로비 앞에서나 볼 수 있는 비를 맞지 않고 자동차에 탑승하는 장소가 있었고, 현대식 주방이 있었으며, 침실에는 침대가 있고 응접실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분명 현대적인 시설에서 받은 이질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 분명 새로웠다.
후원에는 금원, 비원 등 다른 이름이 많다. 먼저 후원(後苑)은 궁궐 뒤편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금원(禁苑)은 왕족 이외에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라는 의미다. 근래 들어 논란이 일고 있는 건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이다. 비원(秘苑)은 1903년 대한제국 당시 창덕궁 후원의 관장 부서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온 것인데, 순종실록 권3 융희 2년(1908) 4월 17조에 보면 순종이 비원(秘苑)에 나가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일제가 후원을 깎아내리기 위해 비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왕의 일생을 생각하며 천천히 나머지 후원을 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바깥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왕을 위한 치유의 공간 후원이, 이제는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치유를 받기 위해 예약을 하고 찾고 있는 이 현시대에 아이러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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