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0년 전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남도답사1번지 여행 코스에는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교통이 불편했기에 강진에서 택시를 타고 백련사로 갔다. 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련사를 둘러보고 만덕산을 넘어 다산초당으로 갔다. 본디 숲 속 그늘진 곳에 위치한 다산초당인데다 겨울이라 일찍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귤동마을로 내려온 뒤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강진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그때와는 반대의 코스를 택했다. 다산초당으로 먼저 오른 것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쓸 당시 이미 변하고 있는 귤동마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10년 전, 나는 그것을 감안하고 귤동마을을 둘러봤는데, 10년 후인 오늘 와보니 귤동마을은 또다시 변해있었다. 여느 관광지에나 있는 으리으리한 전통 민박이나 상점 등이 들어선 것이다. 여전히 건재한 것은 10년 전 버스를 기다리며 딸기우유를 사먹었던 귤동마을 초입의 만덕슈퍼 뿐인 듯했다.
마을 공터에 차를 세우고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가파른 숲길을 올랐다. 발밑에 땅 위로 드러난 나무의 뿌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10년 전의 기억에는 없는 것을 보니 당시에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지금처럼 정호승 시인의 시가 적힌 푯말도 없었던 것이리. 정호승 시인은 이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산길을 ‘뿌리의 길’로 명명했다.
뿌리의 길 -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는 다산의 심정과 그의 인생을 꼭 닮아있었다. 정호승 시인은 이런 뿌리의 길을 쉬이 허투루 지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나날 변해가는 귤동마을과는 달리 다산초당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볕이 잘 들지 않아 숲의 음기를 한껏 머금은 공기는 이곳이 다산의 유배지였음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다산의 유배는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에 연루된 탓이었다. 신유사옥은 안동김씨 세력 중심의 노론인 벽파가 남인계열의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신자가 일부 있었던 시파와 천주교도들을 역모로 엮은 박해사건이다. 이때 다산을 비롯한 많은 실학자들이 유배를 갔다. 당시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은 총 18여년의 유배생활 중 10여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며 그 유명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초당에 오면 사람들은 이곳에 걸린 현판들을 주의 깊게 보고 간다. 다산초당 현판과 보정산방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며, 다산동암 현판은 다산의 글자를 집자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는 ‘다산동암’을 쓴 다산의 글씨가 마음에 든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멋과 기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과 ‘보정산방’은 같은 추사의 글씨라고 보기에는 사뭇 다르다. 먼저 ‘다산초당’에서 보이는 추사의 글씨는 마치 그림을 그린 것 같으면서도 추사의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보정산방’은 그런 자신감 보다는 아이의 동심으로 돌아간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 앉아 명필의 글씨를 감상하며 쉬었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다산초당은 그런 곳이다. 분명 하나하나의 요소는 아름답고 단정하나, 볕이 제대로 들지 않고 사방이 가로막힌 탓에 심리적 안정감은 쉬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산은 어떻게 이곳에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마 낯선 땅으로 온 유배지만 교류했던 여러 사람들과 위민의 확고한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교류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만덕산 오솔길 넘어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였다.
이제 만덕산 산길을 넘어 백련사로 넘어가기로 한다. 오르는 길에 강진만(구강포)을 바라볼 수 있는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으나 공사중이어서 오를 수 없었다.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이라 하는데 공사중이라 오르지도 못하니 오히려 풍광을 해치고 있었다. 조속한 조처가 필요한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쉽지는 않았다. 훗날 좀 더 다산을 알게 되면 다시 올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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