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차 이동경로. 해남 만안리 -> 미황사 -> 땅끝마을 -> 완도 -> 강진 석문공원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전날 밤은 지붕 튼튼한 정자 아래 비바람 막을 방수포 벽까지 설치하고 잔 터라 다행히 물난리는 전혀 없었다. 벽에 설치된 방수포만이 물에 젖어 있었을 뿐이다. 마을회관 현관 앞에서 즉석카레와 냄비밥, 캔 참치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정리했다. 여행자에게 가공식품은 그야말로 필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신선한 재료를 장기간 보관할 수 없는 여름철에는 더더욱. 조촐한 식사가 후 젖은 방수포는 비닐로 둘러싸 트렁크에 넣고, 나머지 텐트와 식기 등은 젖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게 정리해 실었다. 자 이제 떠나볼까? 오늘의 첫 목적지는 미황사다.
미황사는 사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코스였다. 그러나 백련사를 거치며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어제 함께 차를 나누었던 백련사 원정 스님이 백련사로 오기 전 미황사에 있었고 좋은 곳이라며 추천을 한 덕이었다. 만안리에서 미황사까지는 20킬로미터 남짓의 거리어서 천천히 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 내리는 아침, 논밭이 양쪽으로 펼쳐진 시골도로를 달리다 보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먹구름도 무거운 듯 땅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과 땅의 간격이 이토록 좁은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차량 통행이 없는 시골길을 조용히 내달렸다.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리 외에는 한두 대의 차 밖에 없었다. 조용하겠구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곱게 내리던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로 커튼을 친 듯 한치 앞이 보이질 않았다. 주차장 한구석에 있는 기와지붕 화장실 처마에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미황사로 올랐다. 다행히 폭우는 이내 잦아들었다.
주차장에서 경내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도가 높아 경사가 큰 돌계단을 걸어 올라야 했다. 억수로 비가 내렸던 탓에 배수가 좋지 않은 돌계단에는 계곡물이 쏟아지듯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이게 길인지 계곡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 요리조리 물길을 피하며 걸어야 했다.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자 이번에는 지난 비에 축대가 무너져 내렸는지 산사태 현장을 방불케 하는 흙무덤과 바위덩어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굴착기가 있는걸 보니 복구중인 것 같긴 했지만 오늘은 작업이 없는 듯 멈춰서 있었다. 그렇게 미황사 경내로 들어섰다.
“묵언”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묵언 푯말이었다. 참선 수행중이므로 말소리도 발소리도 나지 않게 해달라는 안내표지가 절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절 입구만이 아니었다. 묵언 표지는 대웅보전 앞까지 줄지어 서너 개나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입을 닫고 눈빛만을 교환하며 경내로 들어섰다. 말을 하면 모두가 일제히 우리를 쳐다 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이어폰을 낀 탓에 자신의 목소리 크기를 가늠하지 못해 친구를 부른다는 게 그만 도서관 이용자들 전체의 주목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어떤 분위기였는지 금방 상상이 갈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아니, 쳐다볼 사람들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비가 온 탓인지 모두들 실내로 숨은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보니 절의 초입에 있는 큰 누각인 자하루에서 많은 보살님들이 참선 중이셨다. 템플스테이인지 아님 일반 방문객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주차장에 차가 없었으니 단체로 온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비 오는 날의 참선은 참으로 운치 있게 보였다. 이렇게 보면 사찰은 확실히 세상과 단절하고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지구상은 너무 거창하고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절도 요즘 개발이며 혹은 지나친 상업적 활동으로 본연의 모습이 많이 파괴되고 있기는 하다. 그런 사실들은 대부분의 사찰이 굳이 깊은 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퇴색케 한다.
우리는 대웅보전을 지나 미황사의 가장 높은 지대인 응진당 앞까지 올랐다. 돌아보니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비 탓인지 관광객은 없었고,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마당이며 전각 지붕 곳곳을 적시고 있었다. 덕분에 시끄러운 관광지의 소음도 없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빗소리와 대웅전 안에서 어렴풋이 흘러나오는 스님의 예불소리 뿐이었다. 평소에는 선명하게 보여야 할 먼 산과 들판도 물안개가 피어올라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훌륭한 원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한 폭의 수묵화가 미황사 경내 앞으로 펼쳐졌다. 자연은 때때로 그 자신이 하나의 미술 장르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동서양을 초월하는 빛과 습도, 바람과 계절이 최고의 작품들을 무수히 쏟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슴속에 그런 자신만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풍경은 일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미황사에서 절집의 유래라던가 지역 역사에 관한 설명을 일체 읽어보지 않았다. 지난 14일 동안의 여행에서 십수 곳의 절집을 방문하며 머리가 포화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곳 미황사는 분위기만으로도 그 가치를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묵언 수행이나 참선 수행을 하는 기간이 아니었더라면, 우리의 기억에서 미황사는 전혀 다른 절집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실제 집으로 돌아와 미황사 사진을 찾아보니,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이 마황사 대웅보전의 뒤쪽으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어 우리가 보았던 미황사와는 전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미황사의 모습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이곳 미황사를 찾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분명 나는 새로운 곳을 답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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