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세상의 중심이라 불리는 호주 울룰루나 경외감을 자아내는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처럼 무언가 거대한 스케일과 강렬한 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장소일 것 같은 이름 땅끝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의 어촌마을이다.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어 땅끝마을이라 불린다. 우리나라의 최남단인 마라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육지의 가장 끝 부분, 땅끝인 것이다. 해남군은 땅끝을 ‘한반도의 시작’이라 홍보하고 있다. 물론 시작과 끝, 위와 아래라는 게 보는 사람의 시점에 따라 완전히 뒤바뀔 수 있고, 이곳은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명소라는 점은 알겠지만, 나 같은 일반 사람의 눈에는 땅끝이 그리 한반도의 시작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늘 북쪽이 위를 향하고 있는 지도만을 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땅끝마을의 역사는 사실 그리 깊지 않으며, 오히려 접시에 담긴 물 마냥 얕다고 볼 수 있다. 1987년에야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며 땅끝탑이 세워진 것도 그렇고, 땅끝마을이라는 지명이 행정적으로 사용된 것도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전에도 땅끝마을이라 불리긴 했겠지만 행정구역명은 갈두리였다. 하긴 현대에 들어서야 정확한 측량과 지도제작이 이루어졌으니 한반도 땅의 최남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그리 얼마 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왼쪽, 중간 : 땅끝전망대 / 오른쪽 땅끝탑
여느 국내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땅끝도 명소가 되자 파괴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땅끝마을 뒤편 갈두산 꼭대기에 세워진 흉물스런 땅끝전망대가 가장 눈에 거슬렸다. 대체 이땅의 행정가들은 모두 마천루 성애자들인가? 왜 이리 어울리지도 않는 전망대며 뾰족한 각종 탑을 곳곳에 세워 스카이라인을 더럽히는 것일까? 공무원이나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다. 건축가들은 건물을 디자인할 때 주위 환경과의 어울림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걸까? 땅끝전망대는 관광객을 우악하게 하는 관광지 건축물의 절정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산을 깎아 길을 내는 것도 모자라 모노레일까지 설치해 놓았다. 나는 정상에는 올라보았지만, 모노레일도 타지 않았고 전망대도 들어가지 않았다. 유료였던 탓이 가장 컸지만, 이면에는 오히려 땅끝을 망치는 시설물들 같았기 때문이다.
땅끝마을 중에서도 진짜 땅끝, 탑이 세워진 지점은 가보기로 했다. 계속 이야기 하고 있는 바지만 10년 전 고등학생 시절 나는 친구들과 남도답사를 했었다. 그때 1월 1일 새해를 땅끝마을에서 보내며 구름 사이로 일출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일정적 무리를 하면서까지 애써 땅끝을 찾아왔지만 정작 땅끝탑이 세워진 곳의 존재를 몰랐던 터라 가지 못했기에 줄곧 아쉬움이 남아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아쉬운 기억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땅끝탑은 땅끝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선착장 입구에서 산길을 둘러 꽤 많이 걸어가야 했다. 대체적으로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으며, 중간에는 벼랑길도 있기에 접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찾는 사람도 드물었다. 오가는 길에 단 두 명의 사람을 만났을 뿐이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운동삼아 들른 동네 주민처럼 보였다.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표시가 없어 가는 길이 더욱 힘들었다. 산이나 길을 오갈 때면 늘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빠르게 느껴지는데, 이는 한 번 왔던 길이라 얼마나 힘들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땅끝탑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은 불과 130미터를 앞두고서야 드디어 푯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반도의 최남단에 섰다.
땅끝탑은 단촐한 비석을 기대한 나 자신이 무색하게 높이가 사람 키의 수배에 달하는 쳠예한 삼각 내지는 사각뿔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정선 아우라지의 다리 위에서 본 초승달 모양의 설치물이 그랬듯 참으로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완연하며 푸근한 미가 곳곳에 살아있는 전라지역의 이미지와는 더욱 그러했다. 나를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오직 탑이 바라다보고 있는 바다뿐이었다. 에메랄드 혹은 청자 빛을 머금은 바다는 흐린 날씨라 그런지 그 색이 차분하고 바랜 느낌을 주어 마치 오래된 기억 속 풍경을 맞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다 땅끝마을로 돌아왔다.
오전에 미황사에 땅끝마을까지 보았더니 이미 시간은 점심때를 훌쩍 넘어 있었다. 땅끝마을에서 밥을 먹고 가자고 결정했지만 대부분이 횟집이라 일반 밥집이 많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검색하니 가전라도 한정식집이 나왔다. 까짓거! 한번 거하게 먹자 싶어 큰 맘 먹고 한정식집을 찾아 갔으나 역시 가는 날이 장난인지라 3일간 휴업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다른 한정식집도 보이긴 했으나 가격이 넘사벽으로 보였다. 돌이켜보면 참 나도 먹을 복은 없다. 결국은 작은 백반집을 찾아 7000원짜리 굴비백반을 먹었다. 7000원짜리인지라 감탄할 만큼 특별한 맛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형편없는 식사는 아니었다. 반찬은 소박하면서도 정갈했고 이런 관광지에서 이정도 가격에 먹을 수 있는 밥도 잘 없었기에 우리는 충분히 만족스런 식사를 했다. 게다가 반찬은 시장이고 시장이 반찬이 아니던가?
석문공원, 운전 실수가 호재가 되다
다시 차를 달렸다. 우리는 완도의 가장 남쪽을 찍고 고금도를 거쳐 강진만의 동쪽으로 다시 올라갈 요량으로 무작정 완도로 들어섰다. 그런데 완도에 절반쯤 들어갔을 때 우리는 지도를 통해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다시 강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도는 대한민국 전역을 나타낸 축척이 큰 지도라 지역의 도로가 세세하게 나오지는 않았는데, 그 탓에 완도와 완도 북동쪽의 고금도가 마치 연결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곳은 바다로 갈라져 차가 갈 수 있는 길이 아직 없었다. 난감했다. 결국 우리는 급히 다시 완도에서 나와 강진으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77번 국도는 매우 아름다웠다.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7번 국도보다 나은 듯했다. 지난 봄 영덕을 여행하며 달렸던 7번 국도는 이제 국도의 고속도로화(꼬불꼬불한 옛길을 뒤로하고 왕복 4차선으로 길을 곧게 냈다)가 대부분 진행되어 길이 잘 뻗은 대신 그만큼 해안가에서는 멀어져 바다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를 보기 위해서는 큰길에서 해안길로 다시 나와 차를 달려야 한다. 하지만 77번은 여전히 바닷가를 달리고 있었다. 덕분에 차창에 풍경을 걸어둔 채 이 그림을 만끽하며 운전을 하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운전이 즐거운 길인 셈이다.
완도에서 차를 돌리며 본래는 왔던 길로 바로 되돌아가 강진까지 갈 예정이었으나 도암면 석문리의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늦게 하는 탓에 도로로 들어서는 대신 석문공원으로 들어갔다. 이게 다 네비게이션이 말하는 10미터 앞이 대체 어느 길인지 헷갈린 탓이다. 이런 실수를 나는 종종 하곤 했는데 우회전 길이 연달아 두 개가 나오면 대체 네비에서 말하는 길이 어느 쪽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결국 잘못된 길로 들었는데 다시 차를 돌려 돌아가야 했던 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 호재였다. 석문공원에는 나무와 평지 그리고 정자와 음수대에 화장실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석문공원은 공식적으로 캠핑을 할 수 있는 야영장이었다. 럭키!! 정말 예상치 않은 운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결정했다.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캠핑장에 사람이라곤 우리 둘밖에 없었다. 길고양이들이 오가며 우리를 경계했다. 텐트를 설치한 정자가 평소 고양이들의 화합 자리였나 보다. 아니면 우리의 식량을 호시탐탐 노리는 걸지도. 편의시설이나 규모로 보았을 때 성수기면 사람들로 가득 찰 게 분명해 보였다. 고양이는 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에서 먹이를 구하며 살아왔을 테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심지어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우리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고양이에 잠시 정신이 팔렸지만, 석문공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고 뒤로는 시원한 계곡물이 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 화장실, 개수대, 주차장, 테이블 등 각종 편의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며,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기암이 아름다운 산과 중턱에 자리 잡은 정자가 있어 풍광 또한 수려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룻밤 잠만 자고 가기에는 아쉬운 곳이었다.
전국일주 14일차가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보름 전 시작된 여행은 날을 거듭할수록 조금 급박하게 흐르고 있다. 체력이 떨어진 탓도 있고 비가 방해한 이유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느낀 탓에 우리가 가진 그릇이 모두 가득 찬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고지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 땅끝을 밟은 우리에게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말했다시피 다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더 빠르고 더 쉬운 법이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최악이었던 공포의 밤은 식용유와 함께 어제 이미 지났다. 더 최악의 날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우리 텐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과 14일째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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