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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일상

다시, 필름을 감다


손에서 손으로 그리고 그 손이 다시 나에게로. 10년전쯤 녀석은 급변하는 시대에 무용지물이 되어 그렇게 나에게 왔다. 허나 무용지물인 것은 내게도 마찬가지. 한창 디지털 사진에 심취해 있을때라 더욱 눈길을 두지 않았다.


당시 디지털 사진은 나를 매료했었다. 상시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고, 찍은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맘껏 찍고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사진의 결과물도 좋아졌고 그게 더욱 나를 디지털 사진에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종내 디지털 사진은 나에게서 사진을 앗아갔다. 접근성이 좋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쉽게 찍는 다는 것 역시 그만큼 한 컷당 애정을 덜 쏟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디지털 카메라가 발전을 거듭하면 할 수록 더욱 심화되어 갔고, 어느정도 촬영자가 다닌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다.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 시대. 급발전한 디지털사진 기술은 인간의 기술을 대처했다. 여기서 필름과 디지털의 차이는 명백했다. 필름은 10만원짜리 카메라로 찍던, 백만원 짜리 카메라로 찍던 생각보다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다. 사용자의 기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외하면, 렌즈나 필름 등이 차이를 만든다. 허나 디지털은 카메라는 바디가 곧 이전 필름카메라의 바디이자 필름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35밀리 크기로 고정되어 있던 필름도, 디지털에 와서는 크롭바디, 풀프레임 등으로 나뉜다. 다양한 세부적인 기능 역시 제품별로 큰 차이가 났다. 이제 어떤 카메라를 보유했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물론 위 사실이 절대적이진 않다. 전문 사진가들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전 플립형 폰카메라(지금으로 치면 토이카메라 수준도 못 될 것)로도 멋진 작품을 찍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위 열거한 사실들과 쉽게 찍고, 확인하고, 지울수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적어도 내게서 만큼은 긴 호흡에서 사진의 매력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시각에 대한 나 자신의 투자가 줄어든 연유가 컸다.


예전 필름사진 때는 한 컷을 찍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 말은 곧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오래 들여다 볼수록, 세심히 들여다 볼수록 그리고 비틀어 다르게 볼수록 무심코 지나친 작은 것을 발견하고 때로는 그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뷰파인더는 그저 피사체를 피상적으로만 포착한다. 바로 확인할수 있고 수정할 수 있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가 오히려 디지털 전환을 거치지 않은 날것의 현실 세계 자체를 탐미하는 나 자신의 투자를 줄여버린 것이다.


다시, 우연찮은 계기로 필름 카메라를 꺼내들게 됐다. 필름값은 잊고 있는 사이 세 배는 뛰어 롤당 만원이 기본이다. 현상소는 모두 없어져 택배로 필름을 보내 현상해야 한다. 스마트폰과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으로 필름산업이 순식간에 저물었다더니 이제서야 피부로 실감됐다. "이제 필름사진은 값비싼 취미가 되었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불필요한 소비를 지양하는 나로서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야 필름을 구매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요, 클래식이나 레트로 감성에 대한 기호도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것보다, 좀 더 깊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어서다. 필름카메라가 내게 계기가 되어주길 바란다.

택배로 도착한 필름을 끼우고 감는다. 비싸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셔터를 누를 것이다. 세상이 보여주는 모습 그 속이나 이면을 들여다 볼 것이다. 혹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첫 현상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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