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성재산에 위치한 국보 제198호 단양적성비는 찾아가는 길이 힘겨웠다. 마을과 적성비 사이에 중앙고속도로와 단양휴게소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 가는 길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도 좁고 매우 가팔라 마주오는 차를 만나면 낭패가 될 것 같았다. 다행이 우리가 오르내리는 동안에는 오가는 차는 없었다.
그래도 나름 주차를 위한 공터도 만들어 놓았다. 차를 대는 곳은 고속도로 단양휴게소 바로 옆이었고 그 사이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적성비를 찾은 사람들의 것이 아닌 자동차가 몇몇 보였다. 휴게소 관계자가 분명했다. 어쨋든 우리는 차에서 내려 적성비를 향해 산길을 올랐다.
여행이 끝나고 돌이켜 보니 우리는 수많은 역사유적들을 답사함으로서 국사 교과서에만 보고 상상했던 모습과 실제 모습과의 오차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을 시각과 청각, 후각등의 감각을 통매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오히려 실망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단양적성비는 그 크기나 모양은 책에서 보던것과 같았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놀라움을 선사했으니 바로 그 발견연도였다. 단양적성비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78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서였다. 그 전까지는 국사책은 물론 우리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니, 마냥 외우기만 한 그래서 당연히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았던 우리에겐 큰 충격이었다. 물론 그때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다.
설명에 따르면 단양적성비는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적성비를 오르내리는 길 중턱에는 적성산성이 있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에 산성 저편가지 가볼 엄두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게다가 풀도 좀 우거져 뱀이 나올까봐 무섭기도 했다). 나무그늘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땀이 줄줄 흘렀다.
대략 고려말까지 제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 성의 둘레는 약900m에 이르지만, 성의 대부분은 붕괴되었다고 한다.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문 자리가 남서쪽, 동쪽, 남동쪽의 세 군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남한강 줄기에 면한 북쪽에는 없음으로 짐작하건데 이 성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북쪽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이제 나무그늘에서 내려와 단양을 떠나야 할 때다. 산 아래를 굽어보니 차들이 고속도로를 쌩생 달리고 있었다. 휴게소에서도 더위에 쉬어가기 위한 차들이 한가득이다. 중앙고속도로는 2001년 완전개통되었다. 나도 서울을 오가며 저 고속도로의 혜택을 많이 보았지만, 과연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이곳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그만큼 고속도로개통은 큰 공사다.
이제 예천 회룡포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속의 여행수첩에서 3대 물돌이 마을 - 영주 무섬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을 포함 - 을 모두 채울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쉽게 펼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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