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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전국일주 캠핑

[전국일주 8일차] ② 해미읍성과 천주교 박해

by 막둥씨 2012. 8. 25.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무척이나 넓은 해미읍성 무료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주차장 입구엔 관광안내센터가 있었는데, 때마침 직원으로 보이는듯한 아저씨 한 분이 들어가고 계셨다. 우리는 어제 해미로 오는 길에 인상깊게 보았던 넓은 목장지대를 가볼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그런데 아저씨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구제역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을엄격히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흔히 서산목장이라고도 불리며 예전에는 JP의 목장이었고 현재는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해미읍성은 높이가 5m, 둘레가 1.8km의 성곽으로 돌로 쌓은 석성이다.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함께 원형이 잘 보존 된 조선시대 3대읍성중 하나인 해미읍성은 본디 일반 백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군사적 목적을 위해 설립된 성이었다. 안내자료를 살펴보면 이 성은 조선시대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당시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옮겨 쌓은 것이라 한다. 조선조 세 번째 임금인 태종의 지시로 축조된 뒤, 230여년간 종2품 병마절도사와 85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던 충청지역의 군사중심지였으며 때문에 당시에는 해미내상성(內廂城)으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1651년(효종2년)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며 해미현 관아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해미읍성이 된 것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넓은 잔디밭이 마치 구릉지대처럼 펼쳐져 아늑한 느낌을 준다. 외곽에 석성만 있을 뿐이지 안쪽은 공원 내지는 유원지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아늑함 속에 해미읍성의 어두운 면이 숨어있으니 바로 조선후기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인들을 대량으로 처형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것이다.

 

 

천주교가 일찍이 전파된 충남의 서해안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이곳 해미읍성은 박해가 가장 심했던 지역 중 하나다. 그 이유는 관공서에서 발행하는 안내문에서는 볼 수 없고 읍성에서 멀지않은 해미순교성지를 방문해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해미는 이 지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유일한 군사 진영(읍성)이었는데, 장병 1500명을 거느린 최고 지휘관(영장)이 현감을 겸직해 다스렸다. 그런데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역사의 전면에 나서 본 적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영장은 어떤 방법으로도 공적을 세우길 원했고 그 타겟이 천주교인들이 된 것이었다. 1791년부터 병인박해까지 이지역 순교자가 무려 수천에 달한다고 하니 마구잡이식 처형이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을 통과해 관아로 향하다 보면 길 오른편에 수령 300년으로 추정하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호야나무로 흔히 불리는 이 나무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고문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 내포지역의 천주교신자 1000여 명을 체포, 이 나무에 머리채를 묶어 고문을 자행했다고 하니 바야흐로 역사이 산 증인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잊지 말고 보고자 했던것은 돌다리였다. 이 돌다리는 읍성 서문 옆에 수문이 있고 그 수문에서 흐르는 물 위로 걸쳐져 있었던 것인데, 처형될 천주교인들이 이 돌다리를 지나서 처형장으로 갔던 사실 때문에 박해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따르면 옛날 서산천주교회에서 자기 교회의 명물로 삼을 요량으로 옮겨갔는데, 나라에서 다시 찾아와 철조망과 함께 원상복구시켜 놓았다는 바로 그것인데 지금은 이곳에 없고 해미순교성지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었다. 읍성에서 순교성지는 매우 가까운 거리여서 성벽에 올라서면 보인다. 그런데 막상 가려하니 네비에서 쉽게 나오지 않아 어렵게 찾아갔다. 성벽에서 내려오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순교성지는 들어가기 꺼려질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래도 특성상 단체 관람객이 많을것 같았다. 그런데 앞서 해미에서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이유도 그랬지만, 돌다리에 대한 설명도 이곳 해미순교성지에서는 더욱 잔혹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 돌다리는 단순히 처형장으로 가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돌에 사람을 패댕이 쳐 목숨을 앗는 일이 자행된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때문에 지금도 비가 오거나 하면 돌다리 위로 검은 핏자국이 보인다고 했다. 때마침 비가 온 뒤라 우리는 그 자국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진정 핏자국인지는 장담하진 못하겠으나 그 끔찍함 만은 몸서리 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해미순교성지를 빠져나오는데 숙연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장엄한 순교성지의 건물들도, 추모탑도 그리고 해미읍성에서 보았던 순교자에 대한 갖가지 기념비들도 나는 인상적이었다. 내가 가본 여러 지역중 이렇게 종교색이 짙은 지역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이는 천주교를 뿌리뽑겠다는 그때의 박해가 오히려 이곳을 천주교인들의 성지로 만든 것이다. 역사는 권력자의 뜻대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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