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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전국일주 캠핑

[전국일주 7일차] ④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by 막둥씨 2012. 8. 13.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수덕사에서 내려 온 우리는 덕산을 지나 609번, 618번 지방도를 연이어 달렸다. 이렇게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고풍저수지앞에서 좌회전 길이 나온다. 이 길은 국립 용현 자연휴양림이 있는 가야산 계곡길로서, 양쪽으로 백숙등을 파는 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식당무리를 지나 휴양림 방향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얼마 안가 마애여래삼존불상 입구에 다다른다. 

 

흔히 우리 문화재의 이름을 보면 너무 어려워 보이는 것들이 많은데, 풀이해 보면 매우 실리적이면서도 단순명료하다. 예를들어 마애여래삼존불에서 마애불은 자연의 암벽, 구릉, 동굴 벽 따위에 새긴 불상을 뜻하며, 여래는 진여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삼존은 중앙의 본존과 그 좌우에 모시는 두 보살을 합쳐 일컫는 것이니, 마애여래삼존불은 '바위에 새겨진 세 분의 부처'쯤 되겠다.

 

차를 주차하고 다리를 건너면 그때부터 길지는 않은 계단길이 시작된다. 특히 가파르게 올라가는 돌계단길은 주위로 암석이 굴러다니며 하늘은 나무로 덮여 있어 마치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계단길 끝 관리소가 있는 정상부에만 눈부신 빛이 내리고 있어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런 경외감마저 드는 비오는 돌계단길에서 우리는 여행의 두 번째 뱀을 마주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면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불이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라 한다. 특히 불이(不二)라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리 그 자체를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나오면 짧은 계단길을 오르면 비로소 마애여래삼존불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불이문을 지나기 전 해설사 선생님을 만났는데 우리에게 운이 좋다고 하셨다. 이유를 들어보니 평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우리처럼 오후에 방문한 관람객들은 역광때문에 마애삼존불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아침녘이나 늦은 오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인데, 오늘처럼 비가 오고 흐린 날은 예외라고 하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비가와서 좋은점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쨋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서산 마애삼존불은 1㎞정도 떨어져 있는 보원사지의 발견과 함께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9년 4월 당시 보원사지 발굴조사를 나왔던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이 주변에 또 다른 불교유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주민들에게 수소문을 했는데, 마을노인이 '부처는 아니고 한 남자가 양쪽에 첩을 하나씩 거느린 그림은 있다'고 해서 찾았더니 마애삼존불이었다고 한다. 마을 노인의 표현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 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의 모양에서 신라인의 '천년의 미소'라는 말이 생겨나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상징이 되었던 것 처럼, 이 마애불은 '백제의 미소'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이후 이를 보호한답시고 바위에 구멍을 내고 대목을 잇댄 보호각 안에 가둬두었다. 지금처럼 일반에 공개된 것은 불과 1997년의 일로서 43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홍준선생이 청장이던 시절에 이루어 진 것인데, 이 마애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나 분위기가 달라보인다고 하니 과연 자연상태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흔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상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해설에 따르면 이 마애불은 오랜 전쟁으로 삶이 힘들고 마음도 지쳐 있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위엄 있는 부처님 대신 편안하고 인간적인 부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보살입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나는 이 부처상을 보자마자 속으로 '그래 모름지기 모든 부처상이 이래야지!'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동안 수 많은 절을 들락날락 거리며 느꼈던 것이, 할결같이 모든 부처의 얼굴이 너무 경직되어 있으며 세속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위엄이나 공포의 상징이 되기보단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는 온화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료를 찾다 보니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상의 역사에 관한 것인데, 원래 인도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라서 1500여 년 동안 아무런 상징물도 없이 숭배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4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북부지방을 점령한 이후 그리스 영향으로 인해 불상이 조각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부처의 형상이 정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표정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쓸데없이 경직된 부처상을 만들 필요가 없다. 입가에는 미소, 마음에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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