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가 가까워지자 지금까지의 여행에서는 보지 못한 넓은 논지대가 우리를 에워쌌다. 이곳이 바로 내포평야임이 분명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내포란 과거에 예산, 당진, 홍성, 서산 일대를 일컫던 지방명으로 아직도 예산군 삽교읍에 자연부락명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덕숭총림 수덕사는 해발 495미터의 덕숭산 중턱즈음에 자리잡은 백제시대의 절이다. 혹자는 백제시대의 절이라고 해봤자 건물도 모두 그 당시의 것이 아닐테고, 현대에 와서 지은 건물이 전부라 해도 100년 뒤 후손들에겐 백제시대의 절로 불릴테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볼수는 없다. 시대를 관통하며 지나쳐간 사람들이 있고 문화가 있으며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덕숭총림에서 총림은 강원(스님들의 전문 승가대학), 선원(참선을 주로 하는 선방), 율원(부처님의 계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을 종합적으로 갖춘 사찰을 말한다. 한자로 보면 모을 총叢 수풀 림林인데 향적스님의 풀이에 따르면 나무들이 빽빽하게 많으면 곧게 자라듯이 수행자들도 많이 모여서 생활하면 대중을 의식하여 행동을 조심하게 되므로 수행자가 곧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5대 총림이 있으며 조계총림 송광사, 해인총림 해인사, 영축총림 통도사, 고불총림 백양사 그리고 덕숭총림 수덕사가 그것이다.
주차장에서 나오면 식당 및 상가거리를 지나야 한다. 흔히 유명한 절집이나 관광지 입구에는 이렇게 상점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이곳 수덕사의 상가는 조금 특이하다. 거리 전체를 통일감 있게 조성해 놓은 것인데, 조잡한 것 보다는 훨씬 좋지만 마치 중국영화의 한 장면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선생은 수덕사 돌계단을 중국 무술영화 세트장 같다고 표현했는데, 내게는 이곳 거리가 더 그런 분위기였다.
상가거리를 지나면 매표소가 나온다. 본격적인 절 입구인 셈이데, 대웅전을 보기위해선 문을 4개나 지나야 한다. 맨 먼저 매표소 앞에 선문이 있다. 이 선문은 근래에 지은 것인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칠 없이 나무 색 그대로였는데, 이번에 보니 단청이 되어 있어 화려했다. 단청보단 나무 본 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그 뒤는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을 거쳐야 한다. 황하정루까지 합한다면 총 5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주문을 자세히 보면 용머리 장식이 되어있다. 여느 절의 사천왕상도 그렇듯 이 용머리장식의 용도 표정이 얼빵(?)하다. 왜 사천왕이나 용을 이렇게 얼빵하게 만드는지는 알 수 없다. 영어 표현을 빌자면 덕분에 뭔가 crazy해 보이는 위엄은 있지만, 그것보단 우스움을 자아낼 뿐이다. 어쩌면 과거엔 이런 우스움이 아니라 crazy함에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어쨋든 이 처마장식에 용머리가 이용된 것에는 의미가 있다. 바로 목조건축의 특성상 화재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데, 수신(水神)인 용을 형상화해 놓음으로써 목조 건물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용은 신성시 되는 동물이어서 악을 물리친다는 뜻도 포함된다.
수덕사의 볼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저 경쾌한 대웅전이다. 배흘림기둥에 맞배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 대웅전은 단아암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한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에 의하여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진 건물로, 건축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대표적인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이라고 한다.
나는 비교적 화려한 팔작지붕에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이 수덕사의 대웅전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앞서의 선문에서 언급했듯 나는 단청이 없는 집을 좋아하는데 그런면에서도 수덕사 대웅전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나만의 집을 짓는다면 꼭 맞배지붕의 아담하고 경쾌한 주택을 짓고싶을 정도다. 아직 가보지 못한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에 결국 대웅전만 감상한채 급히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수덕사에는 만공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오지않았다는 만공 그래서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런 만공스님을 깊이 아는 것은 아니나 나는 그의 일화를 사랑한다. 그리고 많이 인용하는 편이다. 유홍준선생의 책에서 그 일화를 빌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험한 산길을 한 스님과 가는데, 이 동행승이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다고 했다. 그때 마침 밭에서 화전을 일구는 부부가 있었는데 만공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냅다 달려가 여자를 덥썩 안고 입맞춤을 했다. 놀란 남편은 쇠스랑을 들고 저 중놈들 죽여버린다고 쫓아왔다. 엉겁결에 동행승도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숨을 헉헉대며 고갯마루에 올라 이제 화전 부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동행승은 만공에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만공이 말했다. "이 사람아, 그게 자네 탓이라고. 그 바람에 고갯마루까지 한숨에 왔지 않나. 이젠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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