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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풀숲에 대한 중2병적 사유


풀-숲 「명사」 풀이 무성한 수풀.≒초망.

풀숲은 우리가 숲이란 단어로 흔히 떠올리는, 나무가 우거진 일반적인 숲과는 다르다. 숲에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길이 있고, 그 길 따라 숲 자체가 인간에게 열려있는 반면, 풀숲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다. 풀숲은 인간에게 금기된 지역 또는 인간의 관심밖 영역이다. 인간이 풀숲에 진입코자 하면 필경 발이 구덩이나 늪에 빠지기 쉬우며, 혹은 거친 풀들에 종아리가 온통 긁힌다.

풀숲은 들짐승이나 야생의 생명들에겐 되려 열려있다. 풀이 당으로부토 웃자라 숲을 이룬 그곳은 들짐승들이 적으로부터 은폐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늑한 보름자리를 제공해준다. 비단 들짐승뿐만 아니라 작은 생명들인 풀벌레와 개구리 등이 어울어져 살 수 있는 생태계를 풀숲은 제공하기도 한다.

풀숲은 인간이 배제된 지구의 날것 그 자체다.

풀숲은 인간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기에 두렵다. 어떤 생물이 살지 모르기에 두렵고, 언제 어디서 발이 빠질지 모르기에 두렵다. 태초의 인간을 꾀내어 원죄를 짓게 만든 뱀과 무방비 상태로 마딱드리게 될 지도 모른다. 풀숲에서 인간은 한없는 약자다.

풀숲은 때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 이야기 속 살인자들이 흔히 시체를 유기하는 곳이 바로 풀숲이다. 풀숲은 일반적인 인간의 발이 닿지 않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인간에게 간혹 도피의 장소이자 범행의 장소다. 풀숲에서 만나는 인간은 때로 들짐승에 가깝다. 아니, 흔한 말 대로 짐승보다 못하다.

우리는 인간 본연에 내제된, 혹은 마음 속 깊은 무의식이나 욕망의 세계를 심연으로 표현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 컴컴한 우물안은 내재된 다양한 모습들이 표출되지 않은 채 어둠 깊숙하게 숨어있다. 그 심연은 때론 거울이 되고 때론 나를 타락하게 만드는 통제하지 못할 본능 따위를 품고 있다. 그런 심연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우리 마음의 깊은 구석 어딘가의 나와 그들이 바로 풀숲에 존재한다.

심연은 필연 개인적이라면 풀숲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다. 풀숲은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함께 공유하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심연이 나를 찾는 도구라면 풀숲은 나와 함께 우리를 찾는 도구다. 풀숲은 어디서나 공개되어 있으나 또 어디서나 인간에게 폐쇄적이다. 나는 이런 풀숲을 사유하고 싶다. 그리고 종내 언젠가는 이 풀숲에 발을 들이고 싶다. 하지만 그 발걸음이 두려움을 바탕에 둔  파괴자의 발길은 아닐것이다. 잠시 공간을 공유하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객이다.

풀숲은 미지의 영역으로서만 의미있다.
풀숲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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