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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사실, 상실, 망실 그리고 기실 

[사실]


회사 동료가 낸 책을 읽게 되었다. 우연찮은 건 아니고, 그가 출판 경험이 있다길래 그를 졸라 기어코 책을 받아낸 것이다. 책은 펀딩을 통해 제작해서 시중에 판매하지 않았기에 구할 길은 그를 통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는 책의 내용이 일기장과도 같아 아직 친구에게조차 보여준 적이 없다고 했다. 며칠을 졸라낸 덕에 받았으니 사실 내게도 보여주기 꺼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그의 책을 손에 넣었다. 표지는 책 이름과 저자가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고, 군데군데 책 쌓인 모양의 실루엣이 흰색으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어서 꽤 단조로웠다. 일반적인 판매용이 아닌지라 독자를 사로잡을 화려한 표지나 문구가 필요 없었을 수 있지만, 그가 직접 책을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단순한 표지는 그의 감각과 미적 지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내지는 재생지로 만들었는지 종이 질감이 거칠었고 종이 자체의 두께감도 있어 책 역시 두꺼웠다.


책을 펼치니 본문에 여백이 많았다. 좌측 면은 아예 간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차지하고 있어 여느 활자 중심인 책들과는 다르게 여유있어 보였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 나는 그가 왜 그토록 책 주기를 꺼려했는지-꺼리기까지 한 게 아니라면 적어도 왜 망설이고 주저했는지 알게 됐다. 책 형식은 그의 독백과도 같았고 내용은 너무나 개인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은 그가 온 몸으로 부딪히며 고뇌한 일상 속 자타의적 관계성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상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다양한 타인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제어 하기 힘든 갈등과 제어가 아예 불가능한 죽음.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마주하는 다양한 여백은 작가의 외침이 고요하게 스며든 자리였다. 그리고 때때로 여백은 작가뿐만 아니라 책 읽는 독자에게 이는 감정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감정을 증폭시키는 참으로 유용하면서도 묵직한 여백. 헌데 이런 삶의 무게가 담긴것도 모른채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재촉했다니. 나 자신을 꾸짖진 않았지만 자세를 고쳐잡고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여백의 미를 생각하며 책이 담고 있는 관계와 상실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상실]


인간의 죽음은 불가역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 사후세계를 믿는 종교인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를 시인하고 있는듯하다.(그렇지 않고서를 현세에서 그렇게 살 리 없다.) 물론 귀신이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 갵은 것들도 수없이 많고 그만큼 이를 다룬 이야기도 많다. 물질적인 실체를 지닌 좀비라는 개념도 있어 몇년전에는 워킹데드라는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들 내용이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만약 현실에서 나타난다 해도 사실 죽음의 불가역성을 반증할수 있는 건 아니다. 귀신이나 유령, 좀비가 이전에 살아 있던 존재의 연장선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부활도 일단은 성서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럼 과거의 기억을 안고 환생한다는 티벳의 달라이 라마는 죽지 않은 것일까.


사실 죽음을 논하려면 죽음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다양한 생명철학적 논의를 해 볼 수 있겠는데, 기본적으로 A라는 사람의 죽음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A의 존재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A의 존재는 A가 지닌 기억과 퍼스낼리티에 있다. 나의 뇌를 드러내 로봇에 옮긴다면 그 로봇이 곧 내가 된다. 뇌가 떠난 육체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뇌에 담긴 정보-기억과 퍼스낼리티가 곧 나인 것이다. 죽음은 이런 기억과 퍼스낼리티의 소멸인데, 지금은 정보를 옮기거나 뇌를 복제할 수 없으므로 육체의 생물학적 죽음과 퍼스낼리티를 가진 개별자의 죽음을 구분하지는 않겠다.


다시, 최근 주변에 부고가 많았다. 몇 달을 사이에 두고 두 차례나 상갓집 방문하기도 했다.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장례식장이 예전만큼 신파로 흐르지는 않지만, 여전히 준비하지 못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는 매우 크다. 나는 이런 슬픔들을 바라보며 죽음과 슬픔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 적 있다. 


'죽음은 왜 슬플까'에 대한 조금은 근원적인 생각. 죽음은 앞서 선언한대로 불가역적이다. 그리고 급작스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므로 형평성에 대한 논의도 제외된다. 이런 죽음이 어떤 인간의 감정 상태와 연결되는 건 죽는 당사자의 상상(정작 죽음이 도래하면 당사자는 어떤 인지도 할 수 없으므로 필연 상상일 수 밖에 없다) 때문이거나 혹은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상상'은 주변인으로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던 10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제2 삶의 권태가 도래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한 '당사자의 상상'은 10대 시절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 역시 평온한 삶을 살아온건 마찬가지인데,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 좀 더 당사자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야 겠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죽음의 가능성에 가까워지게 되어 있으니 나도 조만간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지금의 화두는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이다. 이 상실감 그리고 상실감에 내재된 대표적인 감정인 슬픔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고 어쩌면 아주 복합적인 감정이라 '바로 이것이다'라는 식의 단정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상실감이나 슬픔이 발현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죽음이 없었다면 존재했을 가상의 미래에서 기인하는 안타까움이다. 더는 나와 네가 관계맺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죽음으로서 망자가 박탈당한 가능성과 어쩌면 경험했을 가상의 행복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더는 관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가족이나 친구 등의 상실에서 주로 나타나며, 내가 망자와 더는 관계맺지 못하여 나타나기에 비교적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망자가 박탈당한 미래 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은 자녀나 어린 아이 등의 상실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으며,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나 관계 맺음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전자인 '더는 관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경우 평소 왕래나 소통이 거의 없던 경우도 상실감이 크게 나타날수도 있는데, 이는 남겨진 이인 내가 가능성 박탈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실에 가장 충격을 받은 제3자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상실의 당사자로서 감정을 직접 느끼는 것 보다, 상실의 감정을 느끼는 제3자에 대한 안타까움, 공감, 동정심 등이다. 이를테면 친구의 가족의 죽음에 대해 그 가족 자체의 죽음보다 친구의 슬픔 자체에 공감하여 슬퍼지는 상황을 생각해 볼수 있겠다. 엄밀히 말하면 상실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기에 상실감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슬픔에 대한 슬픔이랄까. 감정의 수평적 이동인 셈이다.


요약하면, 상실을 겪은 남겨진 이는 자기중심적인 '내가 박탈당한 가능성', 타자 중심적인 '망자가 박탈당한 가능성' 그리고 중심 없이 수평적인 '슬픔에 대한 공감'으로 슬픔을 느끼게 된다. 

 


[망실]


상실과 그에 따른 감정의 발생은 비단 사람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때로는 물건에서도 발생한다. 인간 아닌 생명체에 발생하는 매커니즘은 앞에서 언급한 '당사자의 상상'을 배제한다면 '남겨진 이들의 감정' 측면에서 해석 가능해보인다. 하지만 생명체도 아닌 물건은 '죽음'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더 생각해봄직하다. 


물건에는 죽음이 없다. 불가역적으로 상실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건은 고치거나 혹은 동일한 다른 새 상품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 '무언가'를 부여한 물건이다. 특정 의미를 부여하여 퍼스낼리티를 나와의 관계에서 형성한 물건인 셈인데 단순하게는 한정판 상품부터 나아가 사적인 의미가 부여되거나 투영된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유일무이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물건이 망가졌을 경우 우리는 손실에 대한 아픔 외에도 어떠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남겨진 이들의 감정' 중 하나일 텐데, 여기서는 앞서 인간의 경우처럼 '더는 관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라던가 '망자의 미래 가능성이나 행복이 박탈당했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상실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이에 대한 측은지심' 가운데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나마 가까운 하나를 꼽으라면 '더는 관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속할 것인데, 물건과 상호 관계는 애초 불가능하다.(영화처럼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려면 AI는 좀 더 분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소유욕 내지는 해당 물건이 연상시키는 과거 기억이나 추억에 대한 집착에 가깝지 않을성 싶다. 그리고 소유욕과 과거 기억이나 추억에 대한 집착을 통해 나타나는 상실의 감정은 좌절 내지는 분노가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승화되겠지.



[기실]


우리는 감정을 다양한 개념으로 표현한다. 기쁨, 슬픔, 분노, 좌절, 사랑, 증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그 사전적인 의미가 한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명쾌하게 단일 감정으로 발현되지 않는다. 분노 속에 슬픔이 있기도 하고, 사랑과 함께 증오가 싹터오르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 감정은 특정 단어로 결코 논할 수 없는 것인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실에서 오는 여러가지 감정 가운데서는 슬픔이 대표적이겠지만 슬픔 역시 홀로 오지 않는다. 슬픔과 좌절,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상실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게다가 이런 감정은 때로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로 섬세하다. 우리는 물건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물건 때문에 울고 웃고 때로는 숭배하기도 한다. 하지만 물건은 물건일 뿐 우리와 일방적인 관계성을 가질 뿐이다. 그런 관계는 진정한 관계라고도 하기 힘들다. 그저 물리적인 관성이나 심리적인 관성 혹은 주체되지 못하는 감정을 배출구일지도.


게다가 감정의 소용돌이가 이는 건 결국 내 마음 속이다. 아무리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본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철저하게 나에게서 시작하여 나에서 끝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상실감이든 슬픔이든 결국 내 마음이 하는 일일 뿐이다. 죽음 자체는 건조한 어떤 현상이므로 결국 다양한 관계성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았듯이, 이번에는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어떤 의미조차 결국 물리적 형체는 없으나 사실은 건조하기 그지 없는 어떤 상황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시오패스거나 혹은 성불하지 아니한 이상 마음은 본디 겉잡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흥미롭게도 '인간적'이라고 한다.


진리는 결코 아니지만 직접 경험하거나 느꼈던 진실을 이야기 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만 갖고 있을까. 만약 누구도 그리고 어느부분도 동의하지 못한다면 나는 당장 정신과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인간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