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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명왕성과 존재의 인식

by 막둥씨 2018. 12. 24.

사진은 2015년 7월 13일, 뉴호라이즌호가 약 76만8000km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명왕성의 모습이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초등학교때 농땡이를 치지 않았던 이라면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9개의 행성의 암기 쯤은 지금도 너끈히 해낼수 있으리라. 만화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보고 자란 세대에게는 이 행성들의 영문명도  알게 모르게 외웠을 것이다. 세일러 '머큐리', 세일러 '마스' 등. 명왕성은 세일러 '플루토'였다.

그런데 우리가 수십 년간 알고지내던 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상식 뒤바뀌어 버렸다. 바로 명왕성이 없어진 것이다. '뭣이라? 이럴려고 주입식 교육 아래 교과서 내용을 달달달 외웠던 건 아닐텐데?' 빡빡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나는 바로 이런 식의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명왕성이 사라졌다니. 혜성의 충돌로 사라진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타트렉의 스팍대사가 붉은물질을 행성의 핵에 투하해 행성이 송두리째 소멸돼 버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찌 명왕성은 사라진 것일까?

사실은 이렇다. 애초 명왕성은 1930년 미국 천문학자인 클라이드 톰보가 해왕성의 궤도를 통과하는 행성을 찾던 중 찍은 사진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태양계의 9번째 행성으로 분류되어 왔으나, 지난 2006년 국제천문연맹(IAU)가 행성의 분류법을 변경하면서 명왕성의 경우 크기도 충분하지 않고 주변의 얼음 부스러기 등을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중력이 없다는 이유로 행성에서 제외하는 한편 외소 행성으로 분류한 것이다. 명왕성은 이렇게 사라졌고 이제 국제소행성센터(MPC)로부터 소행성 '134340'이라는 새로운 번호를 부여받았다.

다시 질문하면, 2006년 국제천문연맹이 행성의 분류법 자체를 왜 변경했을까? 내부적으로 이유야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가장 큰 이유는 명왕성 발견 이후 명왕성과 비슷한 소행성이 있따라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를 태양계 행성으로 넣자니 너무 많고, 또 따로 빼자니 명왕성과의 형평성 논란이 생겼을 게 분명하다. 이런 일이 인간사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면, 기득권을 쥐고 있는 8개 행성이 텃세를 부린 일이요, 결국 명왕성 개인이 손해를 보는 구조로 전체적으로 왜소행성에 불리하게 기준이 하향평준화 되었다는 논란에 휩싸였을지도. 어쨋든 행성은 입이 없었고, 태양계 행성은 8개로 수정되었으며, 명왕성은 134349이라는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이름으로 소행성이 되었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GO>를 보면 주인공인 스기하라(쿠보즈카 료스케 분)가 친구 정일(호소야마다 타카히토 분)이 죽기 전 건네준 책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친구 정일은 재일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 불량학생들에 맞서다 칼에 찔려 죽는데, 주인공인 스기하라는 정일이 죽은 후 홀로 정일이 건네 준 책,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한 구절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 재일조선인으로서 내적 정체성 혼란과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외부와의 갈등을 겪은 이들에게 '이름'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영화와 동명인 원작소설의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에게 이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이라 했다. 가네시로 가즈키 자체가 태양계 행성 8개에는 들지 못하는 외부인이었으며, 그렇다고 돌아갈 곳조차 마땅히 없는 이른바 경계에 선 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의 근본 원인은 작가 자신에게 있을까? 소설 <GO>의 작가인 가네시로 가즈키 자체는 "국적이란 아파트 같은 것이어서 입주자가 싫으면 언제든지 '해약'하고 떠날 수 있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하며 국적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가 어느 국적이던 혹은 어느 국적의 조상을 갖고 있던 작가 자신은 그저 자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성장배경과 세상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면 소설도 (조금 더 보태자면) 작가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존재란 그리고 존재의 의미란 이렇게 결코 홀로 떨어질 수 없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꽃>을 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서 이름은 표상적인 의미가 아닌 '존재의 인식' 그 자체라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이름은 자칫 선입견의 다른 표현이 될 공산이 크다. 명왕성이던 134349던 존재 자체가 변한 건 없다. 변한 것은 우리가 가진 해당 존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일 뿐이다. 변수는 모두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심연과 같은 인간사가 존재한다.

*첫 문장을 시작한지 만 2년만에 해당 글을 포스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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