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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애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 왜 아무도 No 라고 말하지 않는가?

by 막둥씨 2011. 4. 22.

 나를 아는 지인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과 더불어 무슨 일이든 굉장히 솔직하고 또 직설적이게 이야기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는 나름대로 살아오며 느끼고 터득한 것들이 종합되어 이루어진 성격인데, 특히 몇가지 두려워하며 답답한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상황에서 그러한데, 그 중 하나인 애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를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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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7월 어느 일요일에 섭씨 40도를 웃도는 지독하게 무더운 텍사스에서, 제리 하비 교수가 경험한 일이다. 그날은 너무 무더운 날이었다. 텍사스라는 곳은 모래 먼지가 벽을 뚫고 집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괴롭히는 곳이다. 가족들은 선풍기 앞에서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더위가 시간과 함께 빨리 가버리기만 기다렸다. 제리 부부와 그의 장인, 장모가 한자리에 모인 일요일 오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TV 앞에서 한 손에는 얼음이 든 물잔을 들고 무기력하게 그저 앉아 있는 일 뿐이었다. 그때 장인 어른이 말씀 하셨다. 

 <우리 애벌린에 다녀올까?>

 제리 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무더운 날씨에 어딜 가요? 지금은 가만이 있어도 숨이차요. 더구나, 애벌린은 여기에서 53마일이나 떨어져 있는데, 가는데만 2시간이 걸린다고요.” 그 때, 제리 교수의 아내가 말했다.

 <좋아요, 아버지. 애벌린에서 저녁이나 먹고 오죠. 당신은 어때요?>

 제리 교수는 애벌린이 떠올랐다. 그곳은 식당도 제대로 없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아주 형편없는 그런 곳이다. 더구나, 지금 그들의 차는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58년식 구식 자동차다. 겨우 움직이는 것이 다행인 그런 차를 타고, 먹을 곳도 변변치 않고, 볼거리도 없는 애벌린에 왜 가야하나? 아내의 말에 제리 교수는 대답했다.

 <나는 좋지. 어머니도 괜찮으세요?>

 제리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보다는 아내와 장인의 기분을 맞춰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장모님도 좋다고 동의했다. 그들은 살인적인 더위에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낡은 차를 타고 텍사스 서부의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며, 왕복 4시간동안 차를 타고 애벌린에 갔다 왔다. 그 곳에서 그들이 한 일은 형편없는 식당에서 억지로 한끼를 때우고 온 것이 전부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썰렁한 분위기를 깨려고 제리 교수는 <참, 재미있었네요. 그렇죠?>라고 했다. 그 때, 장모님은 말씀하셨다.

 <난, 별로 재미없었네. 음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도, 당신이 가고 싶어하지 않았소?> 

 <나는 가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가고 싶어하니까, 동의했던 것뿐이에요.>

 제리 교수의 장인과 장모의 말다툼에 제리 교수는 깜짝 놀랐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장인은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분위기가 어색해서 그것을 깨려고, ‘애빌린에 갈까?’라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것이다. 물론, 장인도 애벌린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제리 교수의 부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애벌린에 가고 싶어하신다고 생각한 거다. 물론, 제리 교수의 부인도 애벌린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장모님도 마찬가지셨다. 다른 사람이 가고 싶어하니까, 나도 가고 싶은 척을 해야 상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4명은 그들 중 애벌린에 가고 싶어했던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애벌린에 갔다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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