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 누구나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시대지만, 사실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게다가 몸집이 거대한 현대사회에서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이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간접 민주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어 정당이 후보를 공천하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조금씩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후보는 나를 대변할, 진정 내가 뽑은 후보인가? 아니면 단지 특정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뽑은 후보인가? 여기 이런 의문을 넘어 몸소 후보로 나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기존 정치인도 정당인도 아닌, 평소 지역 발전과 시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하던 ‘아줌마’들이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초순의 아침, 그들을 만나러 과천을 찾았다.
3월 22일 열린 "시민공천파티", 사진출처 제갈임주 님 블로그 (http://forest114.tistory.com/)
생활인이 하는 정치
과천역에서 안내를 받아 한 아파트의 거실로 들어섰다. 네 명의 주부가 수다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 안영(45세) 씨와 제갈임주(43세) 씨가 있었다. 이 둘은 과천 시의원에 출마할 계획으로 이날은 본격적인 선거 활동이 시작되기 전 명함에 필요한 사진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두 사람의 옷차림이 아니라면 나는 네 명의 주부 중 누가 시의원에 출마하는지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당찬 이 두 ‘아줌마’들은 어떻게 정치에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
시작은 2011년 가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역 시민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해온 과천 여성들은 다음 해인 2012년에 있을 총선을 앞두고 모였다. 자칭 ‘사는 게 곧 정치인 동네 아줌마들’이었다. 모인 이유는 하나. 그동안 교육, 먹거리, 생활협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노력과 활동을 해왔지만, 정작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생활의 영역에서 진행되는 그녀들의 활동은 생활을 바꾸기 위한 도구인 정치와 분명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그러나 정치가들과 시민들은 이 둘을 전혀 별개로 여겼고, 그들의 활동은 가능성이 컸음에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이런 속상한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 여성정치모임 ‘파프리카’였다. 그리고 다년간 진행된 파프리카의 논의가 모태가 되어 지금의 ‘과천 풀뿌리정치모임’이 탄생했다.
과천 풀뿌리정치모임은 주민의 생활과 실제 정치 영역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생활인의 정치’를 꿈꾸며, 올 6월 다가올 지방선거에 시의원 시민 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과천 풀뿌리정치모임에 속한 80여 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어요. 과천의 공동육아, 대안학교, 품앗이 등에서 활동하는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제갈 씨는 주민이라면 누구나 후보로 나설 수 있다고 말한다. 과천시에 거주하는 주민 50명의 추천을 받아 후보로 나서면, 내부 선거를 통해 최종후보를 선출할 계획이다. 정당이 아닌 시민들이 직접 내는 후보라는 것이 낯선 개념인지 아직 자발적인 신청은 없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는 모임과 활동을 준비하던 여성 활동가를 중심으로 후보를 내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된 예비 후보가 안영 씨와 제갈임주 씨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예비 후보들
시의원 후보로 나갈 예정이지만, 안영 씨도 제갈임주 씨도 그 전에 둘 다 과천에 사는 평범한 주부다. “현재 부림동에 살아요. 큰애 유치원 때 와서 지금은 중3이에요. 처음에는 직장만 다녔어요. 그러다 2009년 말부터 처음으로 지역 활동을 시작하며 여기 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안 씨는 지역 활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여성정치모임이었던 파프리카에는 직장 때문에 쉽게 참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참여는 못 하고 이야기만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의 모임이 아줌마들의 수다 수준에서 진전되어 지금의 운동이 된 거죠. 모임을 지지하는 마음은 깊이 있었어요.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제갈임주 씨를 존경해요. 그래서 한 달 전쯤 할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나가겠다고 했는데 그게 이렇게 된 거죠.” 안영 씨가 웃으며 말한다.
그럼 이들의 도전은 기존의 정치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그 비밀을 그들의 원칙에서 엿볼 수 있다. “처음 이 계획을 세우면서 정한 원칙이 있어요. 첫째, 시민들이 직접 공천하는 과정 갖기, 둘째, 재선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처음과 같이 동일한 과정을 거치기, 셋째, 두 번까지만 출마하기, 넷째, 시의원과 주민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이 되는 활동가를 두기 등이에요.” 특히 세 번째 원칙은 한두 명 주민의 역량이 커지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주민 전체의 역량이 커지길 바라기 때문이라며 제갈임주 씨는 강조했다. 사실 어느 후보가 지역 주민이자 일반 시민이 아니겠느냐만, 조직화된 시민들의 역량으로 특정 자리를 누구나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특별하다. 그래서일까? 시의원이라는 직책에 대한 질문에 두 예비후보는 하나같이 손사래를 친다. “종종 너희가 뭐 이런 걸 하냐는 분들이 있어요. 그럼 이렇게 말해요. 당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직접 나서라고.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하라고. 저희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요.” 안 씨의 말이다. 제갈 씨도 지금은 본인이 나가지만 미래에는 다른 주민들이 직접 나서길 바란다. “후보들이 지금은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4년 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어요.”
앞서 가는 과천, 그래도 부족하다!
사실 이번에 시민후보를 내게 된 일련의 과정 외에도 이미 과천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서 가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기존 정당의 이름을 달지 않고 시민운동을 기반으로 출마한 후보가 시의원으로 당선된 유일한 지역이었다. 기초의원까지 정당의 공천이 이루어지며 겪은 전국적인 참극 속에서도 과천은 빛을 발한 것이다. 4년 전인 2010년의 지방선거에서도 과천은 앞서 갔다. 당시 시민사회에 몸담고 있던 300여 명의 주민들은 후보 5명의 지지를 선언했다. “시장과 도의원, 시의원 둘에 시의원 비례 대표 한 명으로 이른바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렸어요. 최종적으로 시의원 3명이 당선됐으며, 그중 둘은 재선이었어요.” 제갈임주 씨는 당시 시민사회의 지지 속에서 당선된 후보들은 의회에 들어가서도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했고, 시의 정보를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애썼다며 말한다.
그럼에도 과천의 여성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몇 명의 의원들도 분명 주민들의 바람과 열망을 투영해 당선시킨 후보이긴 했다. 그러나 의원과 주민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여전히 부족했다. 2010년 당선된 3명의 시의원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 보좌관을 한 명 두기도 했지만 활동은 1년으로 끝났고, 주민들의 바람은 만족스럽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안영 씨는 자신들의 시도 자체에 이미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지역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생활정치를 하고 싶어요. 어떻게 말을 걸어야 쉽게 와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해요. 그리고 되고 안 되고 보다 더 중요한 건 모임을 잘 만들어 시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건 아무리 이야기해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에요. 변화를 만들어 내야 시민들이 관심을 갖게 될 거예요.” 제갈 씨도 말한다. “생활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원하는 동네가 만들어져요. 4년 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즐겁게 참여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만약 당선되어 의회에 들어가면, 좋아서 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활동이 공적인 영역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도록 노력할 거예요.”
정당이 아닌 주민들이 추천하는 후보가 등장했다. 과천은 이로서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개념에 한 발짝 더욱 다가서는 날이 오는 걸까? 그리고 주민들의 바람이 진정 정치의 영역에 반영되는 동네가 탄생할까? 이번 지방선거가 자못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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