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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나무를 심자

 

나무를 찍다가

 

-리진-

 

그는 난생 처음
한 아름 거의 되는 나무를
찍어 눕혔는데
그 줄기 가로타고 땀을 들이며
별 궁리없이
송진 냄새 끈끈한 그루터기의
해돌이를 세었더니
쓰러진 가문비와 그는
공교롭게도
동갑이었다
한 나이였다


누가 심었을까
이 나무는?
혹은 저절로 자랐을까?
자라오며 이 나무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하였을까?
얼마나 더 자랐을까
이 나무는? … 꼬리 물고 떠오른 궁리궁리는
마침내 그의 가슴속에서
소리 없는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나무를 심자!


그 외침 속에 그는
자기도 몰래
삶에 대한 자기의
모든 사랑
모든 애수를
부어 넣었다.
자기가 심지 않은 나무를
찍어 쓰듯이
반생도 더 살아 오지 않았는지
갈피없이 더듬으면서
소리없이 거듭 외쳤다.
나무를 심자!

 


 

소설가 이윤기 선생이 방송중 읽다가 눈물을 쏟아냈다는 시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무심코 TV를 보는데 그가 한 프로그램에 나와 예전에는 눈물이 쏟아져 끝까지 낭송하지 못했었다며 이 시를 들려주었다.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몸으로 밀고 온 노년의 소설가에게 육성으로 듣는 시는 어린 내게도 무척이나 감동이었다.

 

오늘 8년 만에 이윤기 선생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이름과 얼굴만 알고 있던 그에 대해 두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먼저 그가 3년 전인 2010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매혹적인 목소리의 기억을 각인시키고 불과 2년이 지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와 내가 고향이 같다는 점이다. 그 역시 내세울 것 하나 없어 이름도 채 알려지지 않은 경상도의 작은 시골지역 출신이었다.

 

이제 곧 서른이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중요한 기점이다. 사람들이 사회로 두 발을 내딛는 초년의 시기이기도 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과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평균적인 나이대 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서면, 사람들은 앞만 보며 달려오던 자신을 한 번쯤 돌아본다. 이윤기 선생의 서른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는 나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자란 동향(同鄕)이지만, 그의 서른 즈음의 동향(動向)은 나와 판이했을 터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나의 것이 보잘 것 없었다.

 

이제 의지를 잃은 체념도 삶에 대한 후회도 잠시 접어두자.

 

이제껏 살아온 시간으로 자신의 나이를 수치화 하듯, 우리는 지나치게 과거에만 연연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살 걸, 저런 결정을 할 걸 하며 후회가 가득한 채로 현재의 자신을 비관하면서. 비록 관성이 작용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은 분명 우리 의지에 달렸다. 아마 나는 높은 확률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두 배는 더 살 것이다. 즉, 아직 인생의 3분의 1밖에 살지 않았다. 인생사 모두가 이미 결정지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시 속 주인공인 ‘그’는 자신이 심지 않은 나무를 찍어 내렸다. 자신이 심지 않은 나무였기에, 인생의 도끼날이 언제 어디에서 자신을 급습할지도 역시 알 수 없다. 그렇다. 시 속의 그가 찍어 내린 나무는 단순한 나무도, 다른 사람이나 생명도 아닌, 나무를 찍어 내린 ‘그’ 자신이다. 결국 그는 나무를 통해 자신의 나이테를 확인했고 자신의 삶과 인생 자체를 적나라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그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서른이든 오십이든 칠십이든 상관없이, 그는 다시 그날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결코 한 번 뿐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나무를 심어야 하는 이유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새로운 나무를 심자.

* 이 글은 2013년 12월말 썼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