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게다가 예기치 않은 병까지 얻어 꼼짝없이 집에만 머물고 있다. 하긴 그 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머물긴 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불가능해서 못하는 것의 심리적 차이는 꽤 크다.
이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종종 젊은 사람은 모두 떠나고 없고 연로하신 어르신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언급하곤 했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 아닌 이사를 온 지 만 4개월. 요즘 흔히 하는 속된 말로 '멘탈이 붕괴'되는 기분이 든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는 단순히 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 즉, 미래를 공유할 수 있는 동일한 세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절망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런데 얼마 전 동네에 새로 이사 온 젊은 가족이 있다. 마을 건물에 세를 내어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 부부는 40대의 나이로 마을에서 매우 젊은 축에 속한다. 물론 나와는 확연히 먼 세대라 무엇인가 공유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이 집에는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딸이 있다. 처음 이 소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 대신 봇도랑 청소를 나갔다가 간단한 뒷풀이겸 회의를 이 식당에서 하면서 부터였다. 그 후로 거의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네를 산책하는 이 소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다. 다만 오가는 길에 몇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나는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큰 위안이 된달까.
문득 10여년 전의 ㅈ형이 그리워졌다. 학창시절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평생 누워지내야 했던 ㅈ형. 인터넷이 이곳 시골까지 보급되자 ㅈ형은 새로운 취미생활을 갖게 되었다. 시와 소설을 쓰며 인터넷공간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종종 들러 형의 컴퓨터를 관리해 주었고 홈페이지도 만들어주었다. 이후 고등학교를 유학하며 뜸해지던 발걸음이 결국 끊어져 10여년을 잊고 지냈었는데 요즘 들어 자주 생각나는 것이다. 지금은 함께 살던 형 어머님의 건강악화로 형제들이 있는 도시로 나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저 흔히 있는 동네 형으로만 여겼는데 또래가 없는 한적한 시골에 있는 지금 그가 그립기만 하다.
흔히 깨지기 쉬운 물건의 대명사처럼 계란을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계란은 폭이 좁은 쪽으로는 쉽게 깨어지지만 폭이 넓은 쪽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이 계란이 수가 많아 지면 능히 계란 한 판 위에 사람이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약한 존재다. 그래서 정말 강인한 사람이 아닌한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혼자살아가기는 벅차다.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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