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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기고

그 아픔에 함께했네

수습(修習). 학업이나 실무 따위를 배워 익힌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늘 배움과 익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는 수습기간을 허용한다. 함께사는길 수습기자 3개월.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익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고 잊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간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아픔이었다.


잔혹한 첫 출근

지난 가을 첫 출근을 하루 앞두고 선배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사무실로 오지 말고 구미 불산사고 취재에 동행하세요.” 그렇게 나는 내 책상 구경도 못해본 채 구미로 내려갔다. 첫 출근이라는 상황과 낯선 선배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과는 반대로 구미를 비롯해 사고가 난 구미국가산업단지 제4단지는 내게 친숙한 곳이었다. 모교인 고등학교가 불과 5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몇몇 친구들의 집은 사고가 난 바로 그 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구미에 접어들자 나는 기억을 되짚어 길을 찾았다.

사고현장은 참혹했다.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반경 내 모든 논, 밭, 과수원의 작물이 메말라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대피소로 피신한 상태. 일부만이 마을회관에 모여 국가재난지역 선포여부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더 많은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인근 대피소로 이동했다. 텔레비전 한 대만이 덩그러니 놓인 황량한 공간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학창시절 가까웠던 친구의 어머님을 만났다. 댁을 떠나 이곳으로 온 지 벌써 삼일째. 하지만 나는 대피소 생활의 불편함보다 사고가 있고 열흘 동안 아무런 조치 없이 마을에서 지내셨던 것이 더 걱정되었다. 함께 지내시는 대피소의 할머니들도 대부분 기관지 통증이나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계셨다.

잔혹한 첫 출근이었다. 태안사태 이후 5년 만에 선포된 국가재난지역에서 나는 가까운 이들의 아픔과 무능한 행정시스템을 몸소 보고 느껴야 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피소를 나서는데 친구 어머님께서 뭐라도 먹고 가라며 나를 붙잡으셨다. 손사래를 치며 문을 나섰지만 어머님은 급기야 내 손에 음료를 쥐여 주셨다. 구미를 떠나며 타는 목으로 음료를 넘겼다. 달았다. 정말이지 달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잊지 못할 사람들

많은 것을 경험시켜주고 싶었는지 선배들은 나를 자꾸 어딘가로 보냈다. 구미를 다녀온 그 주 주말에는 울산과 밀양으로 보내졌다. 2012 생명평화대행진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겨우 일주일 된 신입기자로 경황없던 나는 함께 온 일행을 쫓아다니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각인된 곳이 있었다. 바로 밀양의 송전탑 현장이다. 몇 번인가 인터뷰로 대화를 나눴던 강동균 강정마을회장님이 그토록 밀양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당시 밀양에 도착한 행진단은 단장면 백마산 자락에 위치한 바드리마을 현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일행을 실은 차가 을(乙)자의 산길을 굉음을 내며 힘겹게 올랐다. 획을 그을 때마다 고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바드리마을이 밀양의 3대 오지 중 하나라는 세간의 표현은 정확했다. 그렇게 해발 360여 미터의 산등성에 다다르자 농성을 위한 허름한 움막이 보였고 그 아래로 숲을 파헤쳐 만든 공터가 나왔다. 철탑이 들어설 자리였으나 주민들의 저지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움막을 지키고 계신 분들은 대부분 연로하신 할머니들. 움막을 세우기 전에는 이슬을 맞으며 한뎃잠을 잔적도 있다고 하셨다. 처참했다. 특히 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길이라 할머니들은 내려갈 힘이 떨어지면 비료포대를 타고 산에서 내려간다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그날 밤 잠을 자게 된 부북면 평밭마을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악산 자락 조용했던 산 중 마을의 평화는 송전탑 건설문제로 깨졌다. 우리를 재워주신 이남우·한옥순 주민대책위원 부부가 밤에 숙소를 찾아왔다.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며 연거푸 말씀하셨다. 우리는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밖에 드릴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내 약속을 지켰다. 밀양을 한 번 더 방문한 것이다. 그것도 하루 신세를 졌던 이남우·한옥순 부부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며 또 한 번 약속을 드렸다. 다시 방문하겠노라고. 그리고 그때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러 찾아뵙겠다고. 부부도 송전탑이 백지화되어 마을잔치를 열면 꼭 불러주겠노라 다짐했다. 

비단 밀양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세 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생명평화대행진도 3일을 더 참여, 함께 매연을 마시며 서울까지 걸었다. 전국 각지에서 참가자들이 몰려왔다. 모두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좀 더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답을 찾고 있다.


수습이 지나고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구미. 고사한 과수가 잘려나간 풍경은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케했다


누가 날 위로해주지?

힘들고 서러울 때도 많았다.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비협조적이며 냉랭한 대우를 종종 받아야 했다. 또한 대형언론과 취재시간이 겹치기라도 하면 그들이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힘이 되는 것은 취재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작은 말 한마디와 따스한 체온이었다.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시던 밀양의 할머니, 추운 날씨에도 인터뷰를 위해 다섯 시간 넘도록 밖에서 기다리는 내 모습에 “이런 기자가 또 어디 있나. 칭찬해줘야 한다.”고 말씀해주신 강정마을 주민분은 큰 위로와 힘이 됐다. 그리고 나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바로 우리 책을 구독중인 회원과 독자들이다. 홀로 힘들 때는 늘 회원과 독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들을 대신해 눈과 발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 힘이 났다. 내가 담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도 회원들이 읽으면 그 자체로도 힘이 실릴 것이라 믿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 윤복희의 노래 「여러분」 가사 중 일부다. 비록 나는 지난해 임재범의 열창 덕분에 알게 된 세대지만, 자문자답을 통해 본인의 감정을 전달하는 이 대목에서는 감동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가족도 친구도 아닌 지금 본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청중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힘을 얻었을 것이다. 지금 내 입장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윤복희의 노래를 빌어 말씀드리고 싶다. “그건 바로 여러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