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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기고

자동차가 길을 지배한다! 길 위의 민주주의

by 막둥씨 2014. 2. 4.

뉴욕 브루클린에 조성된 완전도로 ⓒNew York City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몇 년 전 어느 외국에서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차가 오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런데 가까이 달려오던 자동차가 먼저 멈춰서는 게 아닌가? 당황하고 미안한 마음에 뛰다시피 길을 건넜다. 차가 사람을 기다려 주다니! 감히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간 언제나 ‘차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이후 귀국을 하자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길을 못 찾거나 방향을 분간 못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 자체를 잃었을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을 지배하는 자동차

“차 조심해야지!” 부모라면 누구나 길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해본 적 있는 말이다. 말뿐만이 아니라 걱정도 항시 떠나질 않는다. 어느 동네를 가던 길은 아이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어느 길에나 자동차가 있는 탓이다.

사실 도시의 역사 8000년 가운데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불과 10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동차는 100년 동안 도시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보행로는 좁아졌고 자동차도로는 끊임없이 확장됐다. 그나마 있는 보행로도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잠식당하기 일쑤였으며, 자전거는 설 자리가 아예 사라졌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사고의 약자는 차를 타지 않는 사람들이다. 2011년 우리나라 교통사고 중 승용차 승차중 사망자수 비율은 22.5퍼센트지만 보행중 사망자수 비율은 39.1퍼센트에 달한다. 걷는 사람이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에 비해 두 배나 많이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다. 10만 명당 사망자수를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결과는 더욱 참혹하다. 승용차 승차중 사망자수는 2.4명으로 OECD 평균인 2.8명보다도 오히려 낮다. 그러나 자전거 승차중 사망자수는 0.5명으로 OECD 평균인 0.4명보다 높았으며, 보행중 사망자수는 무려 4.1명으로 OECD 평균 1.4명보다 월등하게 높아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네덜란드에 비하면 10배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 건 차를 타는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걷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걷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에 비해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다.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작년 4월 늘어난 뱃살로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겪었던 불편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을 경우 자전거는 자동차와 함께 차도를 달려야 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곁에 두고 달리는 일이란 목숨이 서너 개쯤은 있어서 실수로 하나 정도는 내놓을 수 있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엔리케 페나로사의 철학

깨달음의 경지나 이치를 우리는 흔히 도(道)라 한다. 즉, 길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과정으로서 길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 자체를 길(道)이라 여긴다는 점이다. 통과점이 아니다. 길 자체에 이미 모든 것이 깃들어 있다. 사람과 차가 오가는 도로로서의 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길의 끝 저편에 있는 무언가에만 주목할 뿐 길 자체를 의식하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간 아무런 의문 없이 자동차에 우선권을 제공해왔다.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전용도로를 달리는 보고타의 트랜스 밀레니오(The TransMilenio) ㅇJorge Láscar

콜롬비아 보고타의 시장이었던 엔리케 페나로사는 길 위에 민주적인 평등을 투영했다.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다. 80명을 태운 버스가 있다면 한 사람을 태운 자동차보다 80배나 많은 공간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 “우리는 종종 불평등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 코앞에 불평등이 있어도 잘 보지 못합니다. 100년 전쯤, 여성은 선거권이 없었지요. 그게 정상으로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버스라는 교통수단이에요.” 우리의 수도인 서울은 보고타의 사례를 배워 10년 전부터 버스전용차로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아직도 불완전하다. 엔리케 페나로사의 사상은 버스 정책에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발달된 도시란 가난한 사람이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부자들도 공공교통을 이용하는 도시다.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네덜란드는 미국보다 1인당 수입이 더 많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인다. “걷는 사람들도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만큼 중요합니다.”

보고타의 어느 마을에는 흥미로운 풍경이 있다. 자동차도로는 비포장인데 반해 바로 옆 보행로는 포장이 되어 있다. 그 역의 풍경은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이런 풍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엔리케 페나로사는 이 진기한 풍경을 매우 간단하게 설명한다. “어떤 것이 먼저일까요? 이 동네 사람들의 99퍼센트는 차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정된 재원을 사용하는 방법의 한 예다. 자전거 이용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다. “버스 도로가 그렇듯이 안전한 자전거도로는 민주주의의 강력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전거도로는 30달러짜리 자전거를 타는 시민이 3만 달러짜리 자동차를 타는 사람과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대중교통 전용지구로 선포되며 보행자도로가 늘어난 신촌 연세로 ⓒ서울시


도시의 새로운 시도

오늘날 잃어버린 길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완전도로(Complete Streets)라는 개념이다. 완전도로는 기존의 자동차 중심의 도로에서 벗어나, 자전거 그리고 보행자가 모두 안전하게 이용할 권리를 누리는 도로다. 보행로와 자전거도로를 각각 따로 두며, 필요에 따라 각 도로 사이에 녹지를 형성해 완충지대를 두거나 자동차도로를 S자 모양으로 만들어 자동차의 속도 저하를 꾀하고 불법 주정차를 막는 등 자동차 이외의 교통수단 사용자를 충분히 배려한다. 선진국들은 이미 이런 완전도로를 조성해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작년 9월 청주에서 1킬로미터 길이의 완전도로가 선보일 예정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가 좁아져 교통 불편이 예상된다는 일부 주민들의 반대로 결국 공사는 해를 넘겼다.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규모 자체도 반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아직도 사람들은 자동차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변화 역시 꾸준히 있다. 최근에는 서울 신촌의 연세로가 변했다. 이곳은 번화한 대학가로 평소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다. 그러나 보행로 폭이 불과 3~4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 3~4미터 사이에 온갖 잡화상이며 전기설비, 표지판, 가로수 등이 들어서 있어서 실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1~2미터 정도로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다녀야 했다. 그런데 올해 초 서울시는 이곳을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선포하고 버스만 다니게 하면서 자동차도로 폭을 축소했고, 이와 함께 보행로 폭을 기존의 2배인 8미터로 늘렸다. 보행자들이 권리를 찾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폭이 45미터인 넓은 길에서도 보행자와 자전거가 갖는 공간은 불과 9미터(20퍼센트)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마을 전체에서 차를 몰아내는 시도도 있다. 지난해 가을 수원 행궁동에서 한 달간 차 없는 마을을 실험한 것처럼 말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보봉 마을은 이미 차 없는 마을로 유명하다. 주민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주차장에 자동차를 놓고서, 마을에서는 가능한한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한다. 시내와 연결된 노면 전차가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운행되기에 평소에는 자동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보봉 마을 사람들은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서 벗어났으며, 아이들은 골목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됐다.

ⓒ서울시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

현재 세계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동차는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대기질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 정부도 대중교통 이용률을 높이고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책에서는 뭔가 앞뒤의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대중교통 이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도 투자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확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위한 도로를 늘리면 자동차는 늘어날 테고, 그럼 늘어난 자동차 때문에 또다시 도로를 늘려야 한다. 악순환이다. 자동차를 줄이려면 자동차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대중교통이나 친환경 교통수단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했다. 자동차도로만 닦아 놓으면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정책은 미래를 꿈꿔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길을 추구해야 한다. 다행히 이 둘이 다르지 않다. 이제 모두가 나서서 잃은 길을 되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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