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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잡설

행복을 찾아서

by 막둥씨 2012. 6. 1.

사람의 행복이란 늘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다시말해 타인의 존재여부는 과연 행복의 충분조건인가?

우리는 흔히 돈이 많이 생기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이불에 기대고 누워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맘껏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또한 내일 맘대로 늦잠을 잘 수도 있어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기분이었지만 문득 행복의 조건이 모두 다 갖추어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아직 미래가 불투명한 입장이기도 하지만, 내일 당장 수십억의 복권에 당첨되어 지금 같은 생활을 평생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전히 행복할것 같진 않았다. 이 시간에도 야근중인 바쁜 직장인들 눈에는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잣집 아들, 딸들이 얼마나 많은 자살을 하던가.

가장 먼저 생각 난 해답은 역시 사회를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회를 영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사랑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 한 사람과의 소통만으로도 분명 부족할 것이다. 다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비교가 될 것이다. 경제적인 비교 뿐 아니라 사상의 비교, 외모의 비교까지도 포함된다. 즉 끊임없이 본인보다 못한 비교대상을 탐색하며 행복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웃음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의하면 웃음은 추함 및 품위실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선>에서 웃음을 '타인의 약점 또는 자신의 이전의 약점과 비교해서 자신에게 뜻밖이 우월감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갑작스런 승리감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다. 19세기 초기의 실험심리학자였던 알렉산더 베인은 동일한 생각을 '육체적 효과에서만이 아니라 경쟁자를 앞서가거나 불쾌하게 하는 등 우리가 우월감을 획득하는 모든 곳에 웃음의 명백한 특징이 있다'고 표현했다. 20세기 영국의 익살꾼 막스 비어봄은 '대중들의 웃음에서 남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낯선 것을 경멸하는 2가지 요소'를 발견했다. 이런 웃음에 대한 주장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웃음의 정서가 언제나 공격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타인과의 비교는 양날의 검이어서 본인보다 더 나은 상대방을 인식하면 동일시의 욕구를 느낌과 동시에 그 괴리에 고통을 느낀다. 언제나 나보다 나은 이와 못한 이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혹여나 인간사회의 정점에 서더라도 그는 신에 대한 도전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영원한, 다른 종류의 행복을 찾아볼까 한다. 

칸트는 예전에 이런 물음을 던졌다. 거지가 빵가게에 들어가 손을 벌린다. 주인은 거지에게 갓 구운 빵 한 덩이를 건넨다. 행여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면 동네에서 장사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주인의 행위는 도덕적인 것인가?

개신교에서는 구원을 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않는다. 선행의 동기가 타인이 본인을 알아주기를 원한다던가 혹은 선행이 단순히 본인의 기분을 좋게 하기 때문이라도, 결국 그 동기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 떄문에 이는 죄라는 것이다. 칸트 또한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타인을 도울 때, 쾌락을 느끼는 선행 동기에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고 순전히 내면적 자율에 입각한 의무 동기만이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해방시켰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양조장·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스미스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그 이후로 인간의 행복은 당연 사회를 영위하며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수많은 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진정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또는 열반으로 이르는 길은 따로 있다.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 나는 그 의미는 미천하여 알지 못하나, 그 마하가섭의 웃음은 분명 위에서 언급한 여러 철학자들이 해석한 웃음이 아닐 것이다. 행복의 답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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