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人類世)라는 개념이 있다. 46억 년 전 탄생부터 지구 역사를 여럿 지질 시대로 나누는데, 인류가 환경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현대를 새로운 세로 분리하자는 주장이다.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이 지난 2000년 처음 인류세 개념을 제시했는데, 많은 이들이 핵실험이 처음 실시된 1945년을 인류세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대개의 지질 시대가 백만, 천만 년 단위의 기간으로 나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파격적이다. 그만큼 인류가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방증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인류세의 대표 화석이다. 삼엽충, 암모나이트가 각 지질 시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훗날 인류세의 대표 화석은 인간이 되는 걸까? 제 자신을 만물의 영장으로 부르며, 인류는 일찌감치 지구 생명체의 우두머리를 자처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세의 대표 화석은 인간이 아닌 ‘닭’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전한다. 인류가 소비하는 닭이 한 해에만 무려 600억 마리에 달하기 때문이다. 비단 닭뿐만이 아니다. 공장식 축산이 횡행하며 소, 돼지 등 가축이 밀집, 감금 사육되고 있다. 볕도 들지 않는 환경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며 살만 찌우니 면역력은 약해졌고, 대규모 사육되니 전염병이 쉽게, 크게 돌았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면 동물들은 살처분(殺處分)됐다.
행정적인 어떤 조처일 뿐이라고 상상했던 살처분에 대한 작가의 충격적인 기억은 2010년 겨울 접했던 뉴스로 거슬러 오른다. 영상을 통해 드러난 ‘살처분’의 속뜻은 멀쩡히 살아 있는 동물의 비극적인 생매장이었다. 살처분은 가축 전염병 만연 방지를 위해 감염 동물, 접촉 동물 그리고 그저 전염 가능성이 있는 동물까지 죽여서 처분하는 제도였다. 작가는 “우주를 탐사하고 유전자를 조작하는 시대에 우리가 감염병에 대처하는 수준이 고작 멀쩡한 동물까지 몽땅 파묻는 것”을 좀처럼 믿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일어나고 있었고, 그해 겨울에만 전국 4,799곳의 살처분 매몰지가 조성되었다. 또 의아한 것은 동물을 매장한 무덤이 법적으로 만 3년만 지나면 다시 일상적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4,799곳 매몰지 가운데 100군데를 선정하여 찾고 기록하고 또 사유한다. 인류가 두 발 딛고 선 대지는 어쩌면 인간의 갈망과 욕망을 고스란히 견디며 이를 아로새겨온, 말하자면 인류의 업(業, Karma) 지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오늘날 인류의 업 지도 가운데 아주 극히 일부를 들여다본 것이다.
인류는 무고한 생명을 발아래 어둠 속에 매장했다. 업은 업보(業報)로 돌아오리라. 살처분 매몰로 죽어가는 대지, 공장식 축산의 오폐수, 살충제 및 항생제 남용에 따른 인간 건강의 위협은 당장의 숙제다. 우리는 우리 삶의 터전과 생명을 스스로 위협하고 있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가 녹는 줄도 모르고 태양 가까이 날아오른 이카루스처럼.
작가가 사진으로 담은 매몰지는 인류의 자화상 그 자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전국 곳곳의 살처분 현장을 돌아보며 묻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 우리들의 인간성마저 파묻어 버린 것은 아닐까?” 현실로부터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다는 작가가 끝내 담아 내놓은 우리 자신의 민낯을 용기 내어 직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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