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잡설73 caution : fragile 2 며칠 전 ㅈ형의 이야기를 잠깐 꺼냈을 때 사실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ㄱ형. 그는 누구보다 곧은 사람이었다. 위계질서가 철저히 지켜지던 세계에서 만났던 그는 나의 상사였지만 나는 그가 금새 좋아졌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팍팍함이나 괴팍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직함과 곧은 성격에서 우러나는 그런 카리스마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를 좋아했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고 나서도 그와의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미처 알지 못했다. 곧은 것은 쉽게 휘진 않지만 한계를 넘으면 부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그를 보냈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동료들 중에서도 유독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나와 운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2012. 7. 3. caution : fragile 조용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게다가 예기치 않은 병까지 얻어 꼼짝없이 집에만 머물고 있다. 하긴 그 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머물긴 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불가능해서 못하는 것의 심리적 차이는 꽤 크다. 이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종종 젊은 사람은 모두 떠나고 없고 연로하신 어르신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언급하곤 했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 아닌 이사를 온 지 만 4개월. 요즘 흔히 하는 속된 말로 '멘탈이 붕괴'되는 기분이 든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는 단순히 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 즉, 미래를 공유할 수 있는 동일한 세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절망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런데 얼마 전 동네에 새로 이사 온 젊은.. 2012. 6. 13. 보리 보리가 익었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산스크리트어 ‘anuttarasamyaksambodhi’의 음역어인 이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뜻한다. 아(阿)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無)자에 해당하며 뇩다라(耨多羅)는 위(上)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뇩다라(阿耨多羅)는 ‘이 위에 다시없다.’라는 무상(無上)의 뜻이다. 삼막삼(三藐三)의 삼막(三藐)은 정(正), 즉 올바름을 말하며, 삼(三)은 변(遍), 즉 넓음을 말한다. 본래 변(遍)은 두루하다, 넓게 퍼져 있다는 뜻으로 ‘두루 편’이라 발음하지만, 불교에서는 변이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보리(菩提)는 깨달음 또는 지혜(智慧)를 뜻한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이 위에 다시없는 올바르고 두루한 깨달.. 2012. 6. 10. 달팽이의 여행 그제 밤 욕실에서 발견한 작은 달팽이. 새끼손톱 크기의 1/9정도 밖에 안 될만큼 작은 이 달팽이는 말이 없었다. 좁은 욕조속에 몸을 뉘었을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사실 나도 욕조속에 몸을 뉜건 아니었으니까. 여튼 대형 돋보기를 들이대고서야 찍을 수 있었던 이 작디 작은 달팽이에 귀를 다 기울이고 나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과연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든 것이다. 워낙 귀여워서 그냥 그대로 둘 까도 싶었다. 하지만 욕실에 습기는 충분하겠지만 먹이는 없을 것 같았고, 그대로 둔 달팽이가 작은 욕실창문을 통해 스스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고 보니 애초에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도 .. 2012. 6. 9. 소금과 호수 한 젊은 청년 스님이 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스님은 불만이 많아 항상 투덜거렸다. 그래서 어느날 큰스님을 찾아가, 그동안의 불만과 고통을 털어 놓았다. 그러자 큰 스님께서 표주박에 소금을 가득 퍼주면서 먹어보라고 했다. 큰스님 曰 "맛이 어떠냐" 젊은스님 曰 "당연히 짭니다 스님....!!" 그러자 큰스님은 근처 호수로 가서 그 소금을 호수에 뿌리고 표주박에 호숫물을 받아서 먹어보라고 했다. 큰스님 曰 "이번엔 맛이 어떠냐?" 젊은스님 曰 "당연히 안짭니다 스님.." 큰스님 曰 "거 보거라.. 고통은 담는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호수가 되자! 2012. 6. 6. 행복을 찾아서 사람의 행복이란 늘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다시말해 타인의 존재여부는 과연 행복의 충분조건인가? 우리는 흔히 돈이 많이 생기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이불에 기대고 누워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맘껏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또한 내일 맘대로 늦잠을 잘 수도 있어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기분이었지만 문득 행복의 조건이 모두 다 갖추어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아직 미래가 불투명한 입장이기도 하지만, 내일 당장 수십억의 복권에 당첨되어 지금 같은 생활을 평생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전히 행복할것 같진 않았다. 이 시간에도 야근중인 바쁜 직장인들 눈에는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잣집 아들, 딸들이 얼마나 많은 .. 2012. 6. 1. 철학자는 없다 소로우가 그의 저서 에서 말하고 있듯 요즘은 철학 선생은 있을지 모르나 철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난해한 사상을 품거나 학파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지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혜가 명하는 바에 따라 관용과 신뢰의 삶, 검소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것, 인생의 다양한 문제를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철학자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그럼에도 실천이 부재한 요즘의 철학 선생이 철학을 가르치면서 존경받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이론 뿐만아니라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옛날의 철학자들이 존경받을 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이 앎과 실천이 문제이다. 요즘은 대학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그 어느때 보다 고학력시대다. 학력 인플레에 따른 .. 2012. 5. 31. 고인 물은 썩는다 오늘 집 근처 깊은 산중에 있는 절을 찾았다(http://poolsoop.com/866 참조). 선암산 자락에 위치한 이 암자는 조용하니 고즈넉한 맛이 아주 좋은데, 오늘은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전이라 그래도 사람이 있는 편이었다. 몇 해 전 겨울에 이곳을 찾았을 때 밥도 얻어 먹고 스님이 깎아 주시던 생마도 맛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마침 방문한 우체국 직원의 말로는 우편배달도 눈이나 기타 여건에 의해 1주일에 한 번만 오던 때였으니, 우리의 방문이 스님도 반가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가니 초파일 전날이라 그런지 도시에서 온 손님도 많고 근처 동네에서 온 손님도 많았다. 얼마 전 불교관련 단체에서 면접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면접관 중 한명으로 계셨던 스님의 질문에 '이사장님이 무.. 2012. 5. 27. 뛰시오? 중고등학생들의 소풍이나 현장답사. 과연 그들은 무엇인가 느끼고 또 배우고 갈까? 아니면 그저 해만 끼치는 것일까? 어릴적 기억을 보충하기 위해 이곳에 재방문한 나로서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천천히 걸어서 절터까지 올라온 나를 맞이했던 이 팻말은 사실 귀여운 축에 속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에는 이제 막 한글을 깨우친것 같은 이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의 한 국립공원에서 사적지인 바위에 낙서를 한 한국인 남녀 유학생이 수천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사건이 떠올랐다. 단순히 벌금이나 처벌의 경중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의식의 문제다. 아는 만큼 느끼고 보인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명언이다. 조금만 배경지식이 있었더라면 저 한글을 깨우친 이들의 눈에도 감은사탑이 도화지로 보이지는.. 2012. 4. 14.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